누구에게 지휘봉을? 오케스트라들의 '소리 없는 전쟁'

2013. 8. 23. 10:54연주가

[문화'랑'] 지휘자 유치 경쟁의 안과 밖




베를린 필의 스타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어디에 새로 정착할지가 전세계 클래식계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무조건 거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바뀌었다는 요즘, 오케스트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휘자 선점 경쟁의 안과 밖을 들여다본다.   


오케스트라의 간판은 지휘자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년에 한번 바뀌는 이 간판에 악단 전체의 명운이 걸린다. 지휘자의 역량과 철학이 악단이 만들어내는 음악과 직결돼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슈퍼스타급 지휘자의 임기가 끝나갈 시점이면 전세계 일류 오케스트라들은 바짝 긴장한다. 소수의 스타 지휘자들 사이에서 도미노처럼 일어나는 자리 이동은 곧 오케스트라들 간 역학 관계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먼 래틀은 런던 심포니의 구세주?

두 달 전,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클래식 음악 담당기자 톰 서비스는 '왜 사이먼 래틀과 런던 심포니가 완벽한 조합인가'라는 노골적인 제목의 칼럼을 <가디언> 블로그에 게재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사이먼 래틀을 영국이 데려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명실공히 영국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런던 심포니와 현존하는 최고의 자국 출신 지휘자 래틀은 하늘이 내린 궁합"이라고 강조하면서 런던 심포니는 래틀을 수석 지휘자로 데려오라고 재촉했다. 여러 누리꾼도 영국의 문화적 자존심을 자극하는 그의 글을 읽고 '래틀의 필요성'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사실 사이먼 래틀(58)의 영국 귀환과 런던 심포니행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클래식계의 톱스타인 래틀이 지난 1월 "2018년까지만 베를린 필을 지휘하고 더 이상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밝힌 뒤부터였다. 여기에 이어, 런던 심포니의 현 수석 지휘자인 발레리 게르기예프(60)가 2015년 계약이 끝난 뒤 뮌헨 필로 옮겨 로린 마젤(83)의 지휘봉을 넘겨받겠다고 발표하자, 영국에서는 래틀을 침체한 런던 심포니의 유일한 구세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런던심포니 등 새 지휘자 물색중
사이먼 래틀 계약 5년 남았는데
런던선 벌써 분위기 조성 나서
몸값 비싸고 어려운 노장 대신
음악 외적 영향력 중시 경향 뚜렷
남미 출신 영입해 성공한 LA필은
일찌감치 2019년까지 기한 연장


하지만 래틀이 본거지를 영국으로 옮긴다고 하더라도, 런던 심포니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래틀의 고향인 리버풀에는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이 있고, 래틀의 마음의 고향 버밍엄에는 그가 18년에 걸쳐 무명 오케스트라에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키워낸 버밍엄 시립교향악단이 있다. 어쨌든 런던 심포니는 곧 결정을 내려야 할 것으로 보인다. 비록 대니얼 하딩(38), 마이클 틸슨 토머스(69), 앙드레 프레빈(84) 같은 쟁쟁한 이들이 객원 수석 지휘자나 계관 지휘자라는 이름의 구원투수로 포진해 있지만, 선발투수(음악감독 겸 수석 지휘자)의 선정을 마냥 미룰 수는 없으니 말이다.

유명 오케스트라의 스타 지휘자 선점 경쟁

래틀 외에도 여러 유명 지휘자들이 계약 만료를 앞두고 있고, 런던 심포니가 대외적으로 침묵하는 사이에 다른 오케스트라들은 속속 새 지휘자 계약을 공식화하고 있다. 마리스 얀손스(70)는 네덜란드의 왕립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 자격을 연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보 예르비(51)는 프랑스 파리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독일의 도이체 카머필하모닉 예술감독직과 동시에 유지했던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수석 지휘자직을 내려놓고 2015년 하반기부터 3년간 일본 엔에이치케이(NHK)심포니 수석 지휘자직을 맡기로 했다. 안드리스 넬손스(35)는 2014년부터 5년간 미국의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기로 했고, 여성 지휘자 마린 알솝(57)은 미국 볼티모어 심포니의 음악감독직을 연장하는 계약을 맺었다.

통상 2~3년 전부터 연주 일정을 짜는 오케스트라의 특성상 차기 음악감독은 빨리 정해지는 편이 유리할 법하다. 그래서 런던 심포니가 잠잠한 것에 대해, 래틀을 설득하느라 발표를 미루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래틀의 영국행을 점치는 사람들은 그의 중요한 음악 동반자인 사이먼 할시(55)가 지난해 런던 심포니의 합창 지휘자로 온 것을 청신호로 여긴다. 할시는 래틀이 버밍엄시립교향악단에 재임하던 시절에 합창 지휘자로서 여러 작품에서 짝을 이뤘고, 래틀이 베를린 필에 있을 때 자신도 베를린 방송합창단으로 자리를 옮겨 바흐의 <마태 수난곡>,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지휘자 영입을 둘러싼 복잡한 함수관계

악단이 지휘자를 선정하는 기준은 뭘까. 유명 지휘자가 기존 계약 기간을 마치고 자유계약선수로 시장에 나오면 악단들은 무조건 덤벼들까.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저명한 오케스트라일수록 지휘자라는 독립변수를 예술적, 정치적, 경제적 함수에 두루 대입해보고 신중하게 결정한다. 특히 최근에 서구 오케스트라들이 경기 침체로 인한 정부 지원금 축소, 민간 후원 및 티켓 판매 수입 감소 등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면서, 지휘자 영입 기준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예술적 역량은 기본이고, 기업 후원자의 요구에 맞춰 스타성이 강한 지휘자를 선호하는 것은 차라리 고전적이다. 여기에 더해, 몸값이 비싸고 다루기 어려운 고령의 거장 대신 융통성 있는 젊은 지휘자를 데려와 청중을 상대로 이런저런 실험을 해보려 한다든지, 음악 외적인 영향력을 갖춘 지휘자를 내세워 사회적 기업이나 교육기관의 이미지로 포장하기도 한다.

런던 심포니가 래틀을 영입하더라도, 현존하는 영국 출신 걸출한 지휘자라는 이유 외에 독보적인 흥행력, 베를린 필에서 갈고닦은 교육사업 운영 능력, 버밍엄 심포니홀 건립을 주도했던 추진력과 자금 유치력, 현대 음악까지 아우르는 넓은 레퍼토리 등이 함께 고려될 것이다.

두다멜의 엘에이 필 두마리 토끼 잡다

2009년 베네수엘라 출신의 27살 청년 구스타보 두다멜을 음악감독으로 위촉한 미국 엘에이(LA) 필하모닉도 여러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기 위해 얼마나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을지 짐작된다. 우선 '남미 빈민가 출신의 청년이 북미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는 동화 같은 성공기로 두다멜은 단번에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될 수 있었다.

톱스타가 된 두다멜은 연주회 매표 수익, 음반 판매 수익(5년간 10여장의 음반과 영상물 발매) 등 전통적인 형태의 부가가치뿐만 아니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홍보 효과를 엘에이 필에 안겨줬다. 또한 엘에이 필은 두다멜의 지도 아래 욜라(YOLA)라는 '저소득층 청소년 오케스트라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엘 시스테마'의 감동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두다멜의 영입이 남미계 히스패닉 인구 비율이 높은 캘리포니아주의 클래식 시장을 노렸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려울 듯하다. 이 점을 긍정적으로 보자면, 흑인 인구 밀집 지역을 기반으로 한 디트로이트 심포니가 재즈적인 개성을 확립했듯, 엘에이 필도 두다멜을 통해 라틴 작곡가들의 레퍼토리를 적극 소화하면서 자신들만의 차별화된 음색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엘에이 필은 두다멜의 영입을 성공적이라고 판단한 듯, 2011년 두다멜의 음악감독직을 2019년까지 연장하는 재계약을 맺었다.

김소민 객원기자sompar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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