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회숙의 <나를 위로하는 클래식 이야기> 중에서...

2010. 1. 21. 22:18서양음악

 

 

"음악은 늘 거기에 있으며, 배반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무엇인가에 정신 없이 매료되고 절실하게 하고 싶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진정하게 가치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돈, 명예, 권력 따위가 아닌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순수한 삶의 가치 말이다.

 

나의 분명한 기억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정신 없이 매료되고 절실하게 듣고 싶은 것이 "음악"이었다.

그런데 그 절실했던 음악이 아무데서나 들을 수 있는, 엄마 뱃속에서 부터 태교음악으로라도 수 없이 들었을 대중음악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 반면, 일반 시중에서는 거의 듣기도, 들리지도 않던 클래식 음악과 국악이었다는데 유별남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강렬하게 불러 일으키는 책이 음악 평론가 진회숙의 "나를 위로하는 클래식 이야기" 다.

글 중 "음악 하나로 행복했던 시절"의 내용은 모든 상황이 신기하게도 내 어린 시절과 거의 같다.

특히 야외전축으로 <소녀의 기도>, <은파>,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은 상황은 100% 일치하고 있다.

  

 

 

"음악 하나로 행복했던 시절"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

 

 

  사람들은 내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줄 안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피아노가 있는 집이 별로 없었으니 우리 집 형편이 다른집에 비해 나빴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끼니를 못 이을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집에 피아노가 있었던 것은 가정의 경제 사정에 걸맞지 않게 유난히 높았던 우리 아버지의 교육열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우선순위가 달랐다고나 할까. 남들이 텔레비전, 냉장고, 전축, 선풍기, 전화기와 같은 문명의 이기들을 집안에 들여놓을 때에도 우리 집은 꿋꿋하게 이런 세속의 편리함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지대를 고수하고 있었다. 텔레비전과 전화기는 고등학교때, 냉장고는 대학교때 들여놓았으니 당시 우리 집은 문명의 무풍지대라 할 만했다. 아무것도 없는 집 안에 피아노 하나 달랑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이런 것들이 없어서 불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집에 텔레비전이 있어 매일 연속극을 볼 수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으로 애타게 그것들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딱 하나 예외가 있었다. 바로 전축이었다.

 

어렸을 적에 나와 동생은 늘 음악에 목말라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음악을 즐길 방법이 없었다. 전축이 없었기 때문이다.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만족하기엔 음악을 향한 우리의 열정이 너무니 뜨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그 집에서 야외전축을 듣게 되었다. 그 집 여자는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야외 전축을 틀어 주었다. 그때 들었던 음악이 <소녀의 기도>, <은파>, <엘리제를 위하여> 같은 클래식 소품들과 <사운드 오브 뮤직>의 OST, 그리고 클리프 리처드의 노래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음악을 들으며 우리는 거의 황홀경에 빠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일이 있고나서 우리는 자나 깨나 그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느라 애를 써야 했다. 당시 동생과 나는 각각 초등학생, 중학생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남의 집에 그렇게 자주 찾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만한 눈치는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비비 꼬며 용을 쓰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집에 가자고 제안하는 것은 늘 동생이었다.

  "언니, 음악 들으러 가자."

  그러면 나는 동생의 손을 잡고 그 집으로 가서 쭈뼛쭈뼛 음악을 들으러 왔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러고는 주인의 빈약한 음악적 소양을 말해주는 몇 장 안되는  음반중에서 몇 곡을 골라 마치 천상의 소리라도 되는 양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때 야외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정말로 행복했다.

 

하지만 이렇게 남의 집에 가서 음악을 듣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우리는 '전축 마련 대작전'에 들어갔다. 부상으로 전축을 준다는 방송국 가족 대항 노래자랑에 나가기로 한 것이다.

  초등학생 어린 나이였지만 텔레비전에 나가기 '쪽팔린다'는 남동생은 제쳐 두고 부모님과 나, 여동생 이렇게 넷이 노래자랑에 출전하기로 했다. 결승전에 올라가려면 모두 세 곡을 준비해야 했다. 첫 무대에서는 가족 모두가 <짝사랑>을 불렀다. 첫 번째 관문을 가볍게 통과하고, 두 번째 관문에서는 동생과 내가 이중창으로 <저별은 나의 별>을 불렀다. 이 것도 역시 무사통과. 결국 결승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결승에 오른 또 다른 가족과 1등, 2등을 다투게 되었는데, 사실 우리는 2등을 하기를 원했다. 만약 '불행히도' 우리가 너무 잘해서 1등을 하게 된다면? 원하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받아야 한다. 그런 일이 있어선 절대로 안되지. 이렇게 걱정을 하며 무대에 섰는데 다행히도 상대편의 실력이 만만찮았다. 목사님 가족이었는데, 평소 찬송가를 불러본 경험이 많아서인지 화음이 기막혔다. 그들의 화음이 오묘할수록 우리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 주는 축복의 합창처럼 들렸다. 오, 하느님! 저들에게 꼭 1등을 내려 주시옵소서. 믿사옵니다. 아멘.

 두 팀의 노래가 끝나고 드디어 결과를 발표할 순간이 되었다. 극적인 효과를 높이려고 양쪽에 막대그래프같이 생긴 전광판을 준비해 놓고 점수를 더 많이 받은 쪽의 전광판이 더 높이 올라가게 되어있었다. 타다다다, 드럼이 울리면서 전광판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숨이 멎을 것 같은 심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드디어 '쨍'하는 심벌즈 소리와 함께 전광판이 멈추었다. 상대편의 전광판이 더 높이 올라가 있었다. 순간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동생은 방송 중인데도 감격에 겨워 내 무릎을 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언니 전축이야, 전축!"     

 

 

 

  이런 극적인 과정을 거쳐 우리의 음악적 환경은 '업그레이드'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드웨어는 장만했는데, 소프트웨어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따로 용돈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얼마나 오랜 기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겨우겨우 동전 몇 닢씩 모아서 드디어 라이선스 음반 한 장을 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우리는 그 돈을 들고 시내로 나갔다. 그리고 레코드점에 가서 난생처음으로 음반을 샀다.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음반이었다. 차이콥스키하면 6번 <비창>이 더 유명한데 왜 하필 5번을 샀을까. 지금도 무슨 생각으로 5번을 골랐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음반 재킷에 양파 모양을 한 모스크바의 바실리 사원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아마도 어린 마음에 사진이 멋있어 보여서 그 음반을 선택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참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명곡을 골랐으니 말이다. 이 곡은 특히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가 말 할 수 없이 아름답다. 칸타빌레란 '노래하듯이'라는 뜻인데 처음에 혼이 연주하는 아련한 멜로디가 압권이다.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 멜로디를 듣자마자 그 속에 빠져들게 된다. 그래서인지 이 부분은 차이콥스키의 작품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팝 가수 중에 이 부분의 멜로디를 멜랑콜리한 버전으로 편곡해서 부른 사람도 있을 정도다. 아득히 먼 곳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혼소리. 듣는 사람의 가슴을 따뜻하고 촉촉하게 적시는 그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렇게 혼이 한바탕 가슴을 축축하게 적시고 지나가면 이번에는 오보가 등장해서 특유의 밝고 여성적인 소리로 노래한다. 그 소리가 마치 위안을 주는 듯하다. 혼의 멜랑콜리로 다소 축축해졌던 가슴이 밝고 환한 오보 소리로 위안을 받는 것이다. 오보가 연주하는 이 선율은 곧 현악기로 이어지면서 특유의 서정성을 더해 간다.

  그 후 곡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이때 극적인 긴장감을 조성하며 상승하는 멜로디가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렇게 점점 고조되는 멜로디가 드디어 정상에 오른 순간, 심벌즈가 찬란하게 정점을 찍는다. 듣는 이에게 장쾌한 해방감을 선사하는 대목이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들으며 우리는 정말로 행복했다. 그렇다면 그때, 그 전축의 음질은 어땠을까. 짐작컨데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분명히 형편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 충분히 행복했다. 당시 우리에게 음악은 생명과 같은 것이었으며, 음질은 우리의 음악적 고려 대상에서 빠져있는 비본질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수 십년이 지난 몇 년 전까지도 나에게 음질은 항상 '비본질'이었다. 집에 그럴듯한 오디오 시스템을 갖추어 본 적이 없어서 최상의 음질이란 게 어떤 것인지도 잘 몰랐고, 사실 관심도 없었다. 그저 어떤 상황에서라도 음악은 그 자체로 인간의 마음을 정화해 주는 것이라 믿었다.

  몇 년 전, 10년 넘게 듣던 컴포넌트 오디오를 버리고 그보다 조금 나은 오디오를 장만하기로 마음 먹었다. 오디오 기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용산 전자상가의 한 오디오 가게에 들어가서 내가 지금 이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으니 거기에 맞추어 알아서 꾸며 달라고 했다. 물론 그 돈이라는 것이 컴포넌트 가격의 두세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정도였으니, 가게 주인은 내심 이런 돈으로 "꾸며 달라"라고 말하는 나를 비웃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사가 와서 오디오를 설치하고 첫 번째로 헨델의 <메시아>를 틀었다. 그 순간, 나는 오디오 마니아들이 왜 그토록 기기에 집착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아니 기기에 따라 어떻게 이렇게 소리가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듣던 <메시아>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 이곳저곳에서 클래식 강의를 하면서 여러 종류의 오디오를 접하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각각의 장소에 설치된 오디오 기기의 음질을 비교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의 귀가 점점 건방져졌다. '제발 스피커 좀 바꿔주세요. 스피커에서 깡통소리가 난단 말이에요', '스피커를 저런 곳에다가 설치하니까 다른 잡음이 들리지요' 등등. 날이 갈수록 불만이 높아져 간다.

  나는 앞으로 내 귀가 얼마나 더 건방져질까 걱정이 된다. 요즘은 음악회 가서도 별다른 감동을 못 받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음반으로 듣는 것 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건방져진 내 귀를 달래며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처음 전축을 장만하고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을 들으며 행복해하던 그때로 돌아가자고.

  지금 우리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결핍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가끔 이런 마음이 들 때 나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듣는다. 가진 것 없어도 음악 하나로 행복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며.

 

 

 

진회숙 지음 <나를 위로하는 클래식 이야기> 가운데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