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인심(현중사보 2009년 1월호)

2020. 4. 18. 21:34PRESS

버지께선 젊었을 때 보부상을 하며 전국 방방곡곡 장터를 돌아다니셨습니다. 경주에 집을 짓기로 하였을 때 아버지께서 그러셨습니다.

 

"경주 그 지방 참~ 양반들이라 인심 사나운 사람 한 사람도 없더라. 옛날부터 인심 좋은 지방이라고 소문난 곳이다."

 

그런데 정말 감탄했습니다. 이 '말방리' 라는 곳에 드나든 것이 집짓기 시작할 때부터 그럭저럭 한 해가 다 되어 가는데, 여태껏 동네에서 고함소리 한 번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옆집 할머니랑 대화 중에 상추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 후 수시로 상추를 한 소쿠리 따다가 몰래 마루에 올려두고 가십니다. 농사를 많이 지으시는 뒷집 할머니는 작은 수박만한 호박 대여섯 개씩을 지금까지 다섯 번은 갖다 놓으셨을 겁니다. 쑥스러워 그러시는 건지 언제나 집을 비웠을 때 몰래 그러십니다.

 

바로 어제, 잎 달린 무를 혼자 들기도 힘들 정도로 많이 갖다 놓고 가셨습니다. 건너편 할아버지께선 우리 집 앞을 지나가시다 잠깐 들러 "우리 밭에 고추 좀 따가. 우린 많아. 딸 사람도 없어. 여긴 농사 안 하니까 남는 거 가져다 먹으면 되지 뭐." 하십니다. 조그만 텃밭도 주시고, 배추씨까지 얻어 올 김장거리는 해결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감자, 콩잎, 옥수수, 가지, 깻잎, 고춧잎, 참비름, 머구(머위)에 쌀까지…. 벌써 가져다 먹은 게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대가를 지불할 수가 없네요. 돈도 받지 않으시고….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부산 갔다 올 때 싱싱한 생선을 사다가 조금씩 표 나지 않게 갖다 드리곤 합니다.

 

또 생각납니다. 농한철엔 경로당에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 많이 모이십니다. 보통 오전 9시나 10시 정도에 오셔서 오후 대여섯 시 쯤에 집으로 돌아가시더군요.

 

그 시간을 윷놀이나 사는 이야기로 보내고 계셨습니다. 화투는 거의 하지 않으시고요. 그런데 노시다가 다투는 걸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왜 어른들 게임이나 화투 하시다 보면 심심찮게 싸우기도 하시지 않습니까? 젊은 사람들 스포츠 하다가도 가끔 그러는데….

 

우리 집 건너편에 바닥이 고르고 앞엔 작은 물도 흐르는 것이 평상 놓고 쉼터로 쓰기 좋을 만한 터가 있습니다. 거기가 우리 집 주방 창으로 보면 딱 정면입니다. 맞은편이지요. 아마 직선거리로 20미터 정도 떨어졌을 거예요.

 

거기에서 해질녘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며 밤 9시 정도까지 계시다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맘 놓고 이야기하면 당연히 우리 집에까지 들릴 텐데 소곤소곤 대화법이 몸에 밴 분들인지 아무튼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가 않는 거 있죠.

 

그런데 그 모임이 거의 최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꽤 추울 텐데도 말입니다. 나중엔 담요까지 들고 나오셔서 추위를 피해가며 얘기들을 나누십니다. 늘 조용히 대화하시지요.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도심에서 그런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겠지요? 이런 모습을 보시는 부모님께서는 "이 마을 사람들 정말 좋은 사람들이다. 인심도 좋고. 어쩜 말다툼 한 번 안 하시고 늘 도란도란 지내시는지…." 감탄을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