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하자는대로 하라’고 협박해”

2010. 5. 7. 13:53괜찮은 글


[인터뷰 In&Out]-이원상 금양호 대책위원장 “정부가 ‘하자는대로 하라’고 협박해”

 

해군 천안함 실종자 수색에 참여했다 사고를 당한 저인망어선 98금양호의 실종 선원 7명 처리 문제가 지난달 30일 타결됐다. 이틀 뒤인 2일 인천 경서동 신세계장례식장에 합동분향소가 차려져 시신도 없이 5일장의 장례절차가 진행됐다. 6일엔 영결식이 치러졌다. 사고일(4월 2일)부터 따져 꼬박 35일. 그렇게 98금양호 침몰 사고는 일단락됐다.

그간 98금양호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 요구는 세 가지였다. 선체 인양과 의사자(義死者) 지정, 진상규명. 타결 직전, 선체 인양은 포기했다. 의사자 지정은 일단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한 발 양보했다. 사실상 대책위 요구 대부분이 무산된 셈이다.

협상 타결 직후인 30일 오후 5시 인천 연안동 주민센터 2층 사무실에서 만난 이원상(43) 대책위원장은 자주 눈가가 젖었다. 목소리는 쉬어 자꾸 끊어졌다.

-정부와 한 달 협상했다. 결과에 만족하나.

“만족하지 못한다. 시신 없는 장례식 아닌가. 모든 걸 다 양보했다. 어떻게든 선체를 인양해 시신 한 구라도 찾고 싶었다. 그걸 포기했다. (정부와의 싸움에서) 완전히 진 거다. 희생자 의사자 지정에 정부가 협조해주는 대가로 다 포기한 거다.”

-대책위원장을 맡아 힘도 많이 들었을 텐데(위원장 눈가가 붉어졌다. 담뱃갑에서 마지막 담배를 꺼내들었다).

“여기 와서 골초가 됐다. 하루 반 갑 정도 피웠는데 세 갑이 모자란다(울산 현대중공업 협력업체에서 소장직을 맡고 있는 이 위원장은 형 이용상씨의 사고 소식을 듣고 지난달 3일 밤 12시 무렵 인천에 도착한 이래 한 달 넘게 머물고 있다). 전체 희생자 9명(시신이 발견된 김종평, 람방 누르카효씨 포함) 가운데 부모가 생존해 있는 사람은 2명, 자녀가 있는 사람도 아들을 미국에 입양시킨 김씨를 포함해 두 명뿐이다. 김씨는 술 한 잔 걸치면 아들 얘기를 많이 했다더라. 다 힘들고 외롭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죽음까지 헛되게 해선 안 되는데….”

-결과가 억울한가.

“많이. 망자들에게 미안하다.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 같다.”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이유는.

“실종자 가족 자체가 힘 있는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지 않는가. 국가에 항의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등한시됐고, 홀대 당했고, 죄인 취급을 받았다. 중간에 정부 관계자로부터 협박까지 당했다. 협조하지 않으면 당신들도 얻는 게 없다, 잃는 게 많을 거다, 하자는 대로 해라, 이런 내용이었다. 개인적으로 받은 협박이었다. 대책위 다른 가족들이 알면 발칵 뒤집어진다. 그래서 얘기 안 했다.”

-천안함 사건 처리와 비교해서 불공평했다고 생각하나.

“(천안함 사건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도 슬프다. 희생자 모두 아깝고 젊은 목숨인데 어떻게 안타깝지 않겠나. 하지만 98금양호가 천안함 관련 사고이다 보니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부 대우부터 처리방식, 자세, 국민적 관심 모든 게 너무 달랐다. 이렇게까지 차별대우를 받나 싶었다. 서글프고, 속상하고, 분했다. 희생자 모두 배우자가 없는데다 가족도 많지 않아 매일 대책위에 나오는 인원이 15명 안팎이었다. 사람도 적고 그만큼 목소리도 작았다.”

-의사자 지정을 위해 다 양보했다는데 그 문제 역시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의사자인가,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인가.

“의사자로 지정되면 최고 1억9700만원을 보상금으로 받게 된다. 그게 딱 법으로 정해져 있다. 정부 쪽에서는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에는 규정이 없으니까 보상금을 더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설득했다. 그동안 필요 없다, 무조건 의사자로 해달라고 주장했다. 그러다 정부 얘기를 받아들였다. 시신이 발견된 2명에 대해서는 의사자 신청이 접수됐다. 이들 건이 받아들여지면 실종자 7명도 의사자로 신청하고, 2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의사자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걸로 합의했다. 보상금도 더 주기로 구두 약속했다. 장례비도 전액 지원하고 백령도에 위령비 건립도 추진하기로 했다. 그간 심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대화 통로 자체가 없었다. 인천 중구청 98금양호 사고수습대책본부가 채널인데 해주는 게 없었다. 우리가 공문을 작성해 어느 부서에 전달해달라고 팩스 넣어주면 그걸 전달해주는 역할밖에 못했다. 농림수산식품부, 보건복지부, 총리실, 해양경찰청 어느 쪽 하고도 책임 있는 얘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다 4월 27일 가족들이 서울 정부중앙청사로 올라가 소란을 피우니까 움직인 거다.”

인천=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

출처/원문 보기 :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soc&arcid=0003680382&code=11131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