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한반도 분단 막았다

2012. 4. 18. 07:57역사

[역사 파고들기②] 행주대첩으로 낙담한 나라들은 어디였을까?

 

  
행주대첩의 주역인 권율 장군의 영정.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의 행주산성 안에 있다.
ⓒ 김종성
권율

임진왜란(임란)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허풍이 꽤 심했다.

 

임란 발발 7년 전인 1585년에 그는 서양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를 만난 자리에서 "조선을 점령한 뒤 중국까지 공격하겠다"며 호언장담했다. 또 1587년에 일본 나라(奈良) 지방의 승려가 남긴 <다몬인닛키>란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일본에서는 조만간 조선·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까지 침공할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막상 임란을 도발하고 나자, 도요토미의 태도는 전혀 딴판이었다. 임란을 일으킨 1592년에 그는 명나라와의 강화협상을 지시했다. 협상을 지시했다고 해서, 그가 그냥 물러가려 했다고 오인해서는 안 된다.

 

도요토미의 본심은 명나라와의 협상을 통해 조선팔도를 분할하는 것이었다. 전쟁 초반인 1593년에 제안한 강화조건 제4조에서 그는 "조선 도성과 함께 4개 도(道)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과 명나라의 강화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됐다면, 그의 희망대로 한성을 포함해 경기·충청·경상·전라도가 일본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명나라가 그런 방안에 찬성했을 리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전통적으로, 베이징(북경)에 수도를 둔 중국 정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적대적인 군대가 압록강을 넘는 것이었다.

 

산악지대가 많은 한반도와 달리 만주에는 평원지대가 많기 때문에, 부산에서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것보다는 압록강에서 베이징까지 진격하는 것이 훨씬 더 순조롭다. 명나라가 임란에 개입한 것은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과 명나라 군대의 희망, 산산조각낸 사건은?

 

  
행주산성의 위치. 빨간 사각형으로 칠한 곳. 한강변의 강변북로가 끝나는 지점의 부근에 있다.
ⓒ 네이버 지도
행주산성

명나라 입장에서는 일본군을 조선에서 완전히 철수시키는 게 최선이었지만, 그것이 힘들 경우에는 압록강에서 먼 곳으로 철수시키면 그만이었다. 일본군이 경기 이남을 차지하는 선에서 전쟁이 종결된다면, 명나라로서는 급한 불을 끄게 되는 셈이었다. 일본군이 압록강에 접근하지만 않는다면, 그들로서는 조선팔도 분할방할 방안도 결코 나쁘지 않았다. 

 

당시 명나라는 재정적·군사적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황제인 만력제는 나라 살림을 잘 꾸리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임진왜란과 거의 동시에 터진 보바이(몽골족 출신 장군)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명나라 정부는 은 180만 냥을 소모했다. 국고 잔액이 은 400만 냥 정도면 양호한 편이었으니, 은 180만 냥은 상당한 거액이었다.

 

나라 살림도 안 되는 상태에서 보바이의 반란까지 당한 명나라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임란에까지 개입해야 했으니, 명나라가 이 전쟁에 얼마나 부담을 느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과의 강화협상이 그대로 계속됐다면, 명나라도 조선팔도 분할방안에 찬성했을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명나라가 강화협상으로 기운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임란 초기에 일본군이 압도적 우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임란 발발 보름 만에 선조 임금이 한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임란 초기에 일본군은 파죽의 연승 가도를 달렸다. 나라 사정이 안 좋은데다 일본군마저 막강했으니, 명나라로서는 어떻게든 빨리 전쟁을 마무리하는 게 급선무였던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조선팔도를 분할받고 전쟁을 끝내고 싶은 일본 군대. 어떻게든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 명나라 군대. 이들의 희망을 일거에 산산조각낸 사건이 있었다. 선조 26년 2월 12일(1593년 3월 14일) 발생한 행주대첩이 그것이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이라 불리는 전투다.

 

  
행주대첩비. 행주산성 소재.
ⓒ 김종성
행주대첩비

'조선에 불리한 전쟁 국면'을 '조선에 유리한 전쟁 국면'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행주대첩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이 전투는 1만 명의 조선군이 3만 명의 일본군을 꺾은 사건이었다. 새벽 5시경부터 총 7회에 걸쳐 전개된 행주대첩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정부군뿐만 아니라 승군과 여성들까지 동원해서 결사항전을 벌인 끝에 오후 5시경에야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 제7조가 성내 진입을 시도한 마지막 7회전에서는 여성들이 치마를 이용해 돌을 날라줌으로써 조선군의 전투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행주치마란 단어가 이때 생겨났다고 하는 견해도 유력하다.

 

행주산성은 한반도 허리 지역이자 한성 바로 옆이다. 또 서해와 한성을 잇는 길목에 있다. 또한 한강을 지키는 길목에 있다. 이런 전략적 요충지에서 벌어진 전투를 승리로 이끎으로써, 조선은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이 패했다면 조기 종전에 힘이 실렸을 것이고, 그랬다면 일본이 조선의 절반을 차지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만약 이렇게 됐다면, 한반도는 1945년이 아니라 1593년에 분단됐을 것이다. 이런 불행을 막은 사건이 바로 행주대첩이었으니, 조선 측이 얼마나 흥분했을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명나라 장군 송응창의 '본심'

 

그럼, 행주대첩으로 낙담한 나라는 어디였을까? '그거야 당연히 일본이겠지'라고만 생각했다면, 질문을 약간 수정하겠다. '행주대첩으로 낙담한 나라들은 어디였을까?'로.

 

명나라 군대는 형식상으로는 조선군의 동맹자였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일본군의 동맹자였다. 조선은 일본군을 완전 축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데 반해, 명나라는 일본과 적당히 타협하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점에서 명나라와 일본은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명나라는 조선의 적이었다.

 

행주대첩은 일본과 명나라의 강화협상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었다. 행주대첩 이후에도 양국 간에 조기 종전을 위한 접촉이 있었지만, 이 대첩을 계기로 강화협상은 사실상 명분을 잃었다. 조선의 힘으로도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다는 게 판명됐기 때문이다.

 

'행주대첩으로 낙담한 나라들은 어디였을까?'라고 질문을 수정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일본과 타협하고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기를 원했던 명나라 역시 크게 낙담했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일본 못지않게 행주대첩 '패전'이 불쾌하고 기분 나빴던 것이다.

 

  
행주치마에 돌을 담아 나르는 여성들. 행주산성에 있는 석각화의 한 장면.
ⓒ 김종성
행주치마

행주대첩 당시 명나라가 속으로는 일본을 응원했다는 점은 명나라군 지휘자 송응창의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그가 행주대첩 '패전'에 대해 얼마나 속상해했는지를 입증하는 자료가 있다.

 

행주대첩 직후에 송응창은 축하의 뜻을 담은 전문(정식 용어는 '자문')을 조선 정부에 보냈다. 선조 26년 2월 24일자(1593년 3월 26일) <선조실록>에 수록된 축하 전문에 따르면, 송응창은 권율을 "나라를 중흥시킨 명장"이라고 치켜세운 뒤 그를 승진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것은 송응창의 본심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 정부에 축하 전문을 보낸 뒤, 권율 앞으로 별도의 서한(정식 용어는 '패문')을 발송했다. 선조 26년 3월 28일자(1593년 4월 29일) <선조실록>에 인용된 이 서한의 핵심은 '일본군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자중하라'는 메시지였다. 일본군과의 강화협상에 차질이 생긴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것은 권율이 제2의 행주대첩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조선 정부가 행주대첩의 여세를 몰아 일본군을 코너로 몰지 못하도록 하는 견제조치였다. 형식적으로는 권율 앞으로 보내는 것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조선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본심을 담은 서한을 조선 정부가 아닌 권율 개인에게 발송한 것은, 자신들이 공식적으로 일본을 편들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런 의도를 알고 있었기에, 조선 정부는 송응창의 서한을 권율에게 보내지 않았다, 대신, 조선 정부에서는 "조선은 휴전 및 강화를 반대한다"는 공문을 송응창에게 발송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이처럼 행주대첩이 조선 분단을 막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일본뿐만 아니라 명나라도 행주대첩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민족의 생존과 번영은 한민족 스스로 책임질 수밖에 없으며, 한민족을 돕겠다고 나서는 외세도 결정적 순간에는 한민족의 적과 손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조선을 돕겠다며 주둔한 주한명(明)군도 일본에게 조선 절반을 떼어줄 뻔했으니, 이 세상에 어느 외세인들 믿을 수 있을까. 한민족을 지키는 최선의 방책은, 권율과 행주산성 사람들처럼 돌멩이라도 집어 들고 열심히 싸워 스스로를 지키는 길뿐이다. 

ⓒ 2012 OhmyNews

출처/원문 보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24394&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