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삼거리에 가면 '죽음'을 맛볼 수 있다

2012. 4. 5. 07:57역사

[경주 여행 15] 구정동 방형분과 신문왕릉

 

 불국사 아래 구정동 방형분의 무덤 속. 대형 무덤인 천마총에 들어가 선 채로 둘러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생생한' 체험 현장이다. 등을 구부린 채 손으로 관을 짚으면서 캄캄한 무덤 속을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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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있는 불국사 삼거리를 그냥 지나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곳은 결코 무심히 지나쳐도 괜찮은 그런 곳이 아니다. 삼거리 모서리에 방형분(方形墳)이 하나 있는데, '당장' 보고 가야 한다. 경주를 여행하는 이동 경로로 볼 때도 '지금' 당장 들어가 보지 않으면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지 알 길이 없다.

특히 이곳은 신라 때의 무덤 속을 옛날 모양 그대로 보여주는 유일한 답사지다. 게다가 이곳 구정동 방형분은 신라 무덤(墳)들이 모두 원형인 것과 달리 저 혼자서 네모(方)꼴(形)을 하고 있다. 행정 주소가 구정동이기 때문에 '구정동 방형분'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무덤은 한 변의 길이가 9m이고 높이는 2.7m다. 이곳은 사적 27호로 지정을 받은 중요 유적이지만, 정작 묻힌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신라인의 무덤 속에 직접 들어가보자

 구정동 방형분은 네모 난 모습을 하고 있어 보통 보는 신라의 무덤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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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는 찾은 이가 별로 없지만 이 무덤은 일반 답사자들의 인기를 끌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언제나 무덤 안이 열려 있다는 게 바로 그것. 통일신라 시대의 무덤 속을 자유로이 드나들어 볼 수 있는 곳은 천마총과 이곳뿐이다.

그런데 이곳은 천마총에 들어가는 것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천마총은 발굴 후 안을 현대식으로 꾸며 전시장을 조성했다. 또 천정이 높기 때문에 무덤 안에 갇힌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구정동 방형분은 그 반대다. 캄캄한 통로를 기다시피 허리를 구부려 안으로 들어가면 무덤의 벽이 사방으로 온몸을 에워싸고, 천 년 세월 동안 관이 놓여 있던 자리가 눈 바로 앞에 버티고 있다. 신라인의 무덤 속에 직접 들어가 보니 '인생이란 무엇인가' 같은 관념적이기만 했던 철학적 의문이 전신을 감싸고 일어난다. 희귀한 체험이다. 이곳이야말로 감동을 맛볼 수 있는 역사유적이다. 찾아가, 반드시 안에까지 들어가 볼 일이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 좌우에는 수호신이 지키고 있다(사진 왼쪽). 캄캄한 무덤 속에서 밖을 바라보면 햇살이 환하다. 이승과 저승의 차이는 이처럼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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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형분에서 우회전해 경주 시내로 간다. 구정동 방형분이 누구의 무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여기서부터 경주까지 계속 김씨 임금들의 왕릉이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남산 서편 비탈이 박씨 임금들의 안식처인 데 반해 이곳에서부터 반월성까지는 줄곧 김씨 왕들이 편안히 누워 있으니, 신라 당대에 각 성씨들이 지역을 달리해 거주하고 묘소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정동 방형분에서 모퉁이를 돌면 금세 신라 32대 임금 효소왕릉과 33대 성덕왕릉을 만날 수 있다. 형제인 두 임금의 무덤을 둘러보고 경주 시내를 향해 올라가다가 오른쪽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45대 신무왕의 능도 볼 수 있다. 그리고 52대 효공왕릉도 답사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왕의 무덤은 관광안내도를 들고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주소는 경주시 동방동 660번지와 경주시 배반동 산 14번지.

대구 천도 계획을 이루지 못한 신문왕릉

신라의 왕들 중에서 오릉, 무열왕릉, 미추왕릉 정도만이 누리고 있는 대우가 있다. 이들은 담장으로 보호를 받고, 출입을 통제하는 대문이 설치돼 있으며, 넓은 잔디밭을 자랑한다. 그에 비하면 '신라의 광개토대왕' 진흥왕릉은 그저 무덤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심지어 '신라의 세조' 격인 지증왕은 무덤조차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볼 때, 신무왕릉과 효성왕릉 초입에 있는 신문왕릉이 신라의 어느 왕릉에 견줘도 모자라지 않을 면모를 뽐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은 스스로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했으니 예외로 두더라도, 시조 박혁거세 등을 모신 오릉,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무너뜨린 태종 무열왕릉,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릉과 대동소이한 품격을 누리는 무덤이 바로 신문왕릉이기 때문이다.

 무덤을 향해 정중하게 절을 하는 자세로 자라 있는 소나무가 특징적인 신문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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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배반동 453-1번지에 있는 신문왕릉은 사적 181호다. 왕릉 앞 안내판은 '(신문왕 김정명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의 백성을 융합하는 데 힘썼고, 국학(國學)을 두어 인재를 양성했다'고 소개한다. 국학은 유교의 통치이념을 심화하고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둔 통일신라의 교육기관으로 이해된다. 신문왕은 통일 이후 본격적인 왕권 강화에 나섰던 것이다.

왕은 통일 직후 공을 내세워 왕권에 도전하다가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척결하면서 '불고지죄(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죄)'를 적용해 병부령(국방장관)과 그 아들을 죽이는 등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또 689년에는 녹읍(祿邑·관리에게 주던 농토)을 폐지했다. 그러나 왕은 681년부터 692년까지 11년 동안 재위하면서 직접 장산성(경북 경산)까지 답사해 달구벌(대구)로 수도를 옮기려 했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만약 신문왕이 서울을 대구로 옮기는 일에 성공했더라면 우리나라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왕릉 옆에는 천도 여부를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듯, 마치 왕에게 무엇인가 귓속말을 하는 듯한 자세로 그윽하게 온몸을 구부린 소나무 한 그루가 오늘도 묵묵히 자라 있다.

 신문왕릉은 오릉, 무열왕릉, 미추왕릉처럼 삼문, 담장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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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동 방형분에서 신문왕릉 사이에 있는 김씨 임금 네 명의 무덤
경주의 역사유적을 한 곳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답사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나그네를 위해서는 구정동 방형분에서 신문왕릉 사이에 있는 네 김씨 임금들의 무덤도 안내해야 한다.

 효소왕(왼쪽)과 성덕왕의 무덤. 아우인 성덕왕의 무덤은 호석, 돌사자 등을 두루 잘 갖추고 있는 신라왕릉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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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동 방형분에서 경주 시내 쪽으로 가기 위해 모퉁이를 돌면 바로 오른쪽에 신라 32대 임금 효소왕(692~702 재위)릉과 33대 성덕왕(702~737)릉이 철길 너머로 보인다. 그래도 함부로 철길을 건널 일은 아니다. 기차가 달려와도 잘 드러나지 않아 위험하고, 차를 몰고는 건너가지 못한다는 표식도 돼 있다.

'경고 선로 및 철도시설 안에 철도공사의 승낙 없이 통행하거나 출입하는 경우에는 철도안전법에 의거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 한국철도공사 대구본부장'

철길 이쪽에 주차를 하고 100m가량 걸어가거나, 아니면 조금만 더 북진하여 이정표가 재차 서 있는 곳에서 차를 몰고 철길을 건너야 한다. 왕릉은 철길 건너면 곧장 나타나기 때문에 경고판 앞에서부터 걷는 것이 좋겠다.

두 왕은 무열왕의 증손자이자 문무왕의 손자이고, 신문왕의 아들들이다. 하지만 통일 이후 나라가 태평해지면서 이름을 떨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인지 무열왕과 문무왕처럼 역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지는 못했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성덕왕이 재위 21년(722) 지금의 경주 외동면 모화리에 모벌군성(관문성)을 쌓아 왜적의 침입을 막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성덕왕릉의 안내판에는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의 뒤를 이어 36년 동안 통치하면서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나라와 외교를 활발히 했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태평성대를 이룩했다'고 기록돼 있다.

효소왕·성덕왕·신무왕·효공왕... 모두 김씨

효소왕릉과 성덕왕릉은 둘 다 사적이지만 찾는 이 없는 적막강산이다. 두 왕릉의 위치는 경주시 조양동 산8번지로 주소지가 같다. 그런가 하면 경북도 유형문화재 96호인 성덕왕릉 귀부는 조양동 666번지에 있다. 귀부가 왕릉 바로 옆에 있지 않고 저 홀로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번지수만큼 그렇게 위치가 멀지는 않아 왕릉에서 실물을 찾는 데 어려움은 없다.

머리가 사라지고 없는 귀부는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기세를 북돋우고 있는 그의 발을 보노라면 문득 마음이 풀린다. 안내판에는 '(성덕왕의 아들인 35대 임금) 경덕왕 때 만들어진' 성덕왕릉 귀부는 '6세기 이후부터 8세기 사이의 귀부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적혀 있다.

형제 사이인 효소왕과 성덕왕이 죽은 뒤에도 나란히 누워 우애를 나누는 들판 같은 구릉에서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며 쉰다. 솔숲을 지나온 바람이 나의 얼굴을 간질인다.

 신무왕릉(왼쪽)과 효공왕릉. 재위 기간이 1년에 불과한 탓인지 신무왕의 무덤이 특히 초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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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나타나는 왕릉은 45대 신무왕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무왕의 재위 기간이 839년으로 나온다. 839년에 임금 자리에 올라 839년에 죽었다는 뜻이다. 어렵사리 임금 자리에 오른 그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신무왕이 어렵게 임금 자리에 앉았다는 말은 그가 아버지나 형으로부터 곱게 왕좌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복잡하기 짝이 없었던 당시의 왕위 계승을 내막을 알아보자.

42대 흥덕왕(826~836·10년 재위) 3년(828) 정월, 김우징이 시중이 됐다. 같은 해 4월, 당나라 서주에 건너가 군중소장으로 있다가 귀국한 궁복(장보고)이 왕을 알현한 후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청해(지금의 완도)를 수비하게 됐다.

흥덕왕이 붕어했을 때, 그의 종제 균정과 종제 헌정의 아들 제융이 서로 왕이 되고자 했다. 이때 시중 김명 등은 제융을 지지했고, 아찬 우징은 아버지 균정을 지지했다. 결국 전투가 벌어졌다. 균정은 피살됐고, 이때 김양도 활에 맞은 채 우징과 함께 도주했다.

제융이 즉위해 43대 희강왕(836~838·2년 재위)이 됐다. 그러나 재위 3년째인 383년 정월, 상대등 김명 등이 군대를 동원해 반역을 일으켰고 희강왕은 궁중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이제 김명이 왕위에 올랐다. 44대 민애왕(838~839·1년 재위)이다. 김양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군사를 빌려 민애왕을 쳤다. 839년 봄, 양쪽 군사는 달벌(대구)에서 격돌했다. 왕도 잡혀죽었다.

김우징이 왕위에 올라 45대 신무왕(839)이 되었다. 그러나 병으로 그 해에 죽었다.

 문성왕릉. 서악고분군 뒤 선도산 등산로 입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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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왕의 아들 경응이 왕이 됐다. 46대 문성왕(839~857 재위)이다. 즉위 직후 문성왕은 장보고의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큰 벼슬을 내렸다. 그 후 재위 7년(845) 장보고의 딸로 왕비를 삼으려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포기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장보고가 이듬해인 846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암살당했다. 그가 역사에서 사라진 이후 우리나라는 마침내 해상강국의 지위를 잃었다.

신무왕의 무덤은 보잘것없다. 심지어 안내판조차도 '(삼국사기에 제형산 서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 신무왕의 무덤이) 이 무덤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소개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제형산은 지금의 관광안내도에 형제산으로 적혀 있는 얕은 봉우리이다.

신무왕릉은 시호가 비슷한 신문왕릉에서 찾는 게 쉽다. 7번 도로 길가에 있으면서 담장과 출입문까지 거느리고 있어 눈에 두드러지는 31대 신문왕릉에서 출발하여 오른편으로 100m가량 가면 철길을 건너는 좁은 도로가 나온다. 그리 들어가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신무왕릉은 마을 안 골목길에 붙어 있다. 사적 185호이지만 찾기가 간단치 않으므로 주소를 덧붙여둔다. 경주시 동방동 660번지.

신문왕 뒤로 들어가 왼쪽으로 꺾으면 논길을 따라가다가 작은 마을 안에서 52대 효공왕릉(897~912년 재위)과 마주치게 된다. 효공왕은 이미 궁예가 나라를 선포하고 왕궁을 건설했으며, 견훤이 대야성(합천)을 공격해오는 등 신라의 국운이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던 시절의 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왕릉은 마치 숨어 있는 듯 가려져 있다. 사적 183호로, 경주시 배반동 산 14번지가 그 주소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90012&PAGE_CD=N0001&CMPT_CD=M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