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8. 12:10ㆍ내 이야기
보리출판사는 지난 1일부터 오전 9시 출근-오후 4시 퇴근을 의무화했다. 이전보다 하루 근무 시간을 두 시간 줄였다. 사상 초유의 주 30시간 노동제를 시작한 것이다.
지난 14일 오후 4시10분쯤 유이분 보리출판사 경영지원실 부장은 회사에서 도보로 2분쯤 거리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2200번 버스에 올랐다. 출퇴근 시간 2200번 버스는 경기 파주시 교하읍 출판도시에서 일하는 직원들로 채워지지만, 퇴근 시간이 아닌 탓에 버스는 한산했다.
평상시라면 이 시간에 서울로 나갈 일은 드물었겠지만, 3월 1일부터는 오후 4시 서울행이 일상이 됐다. 이 시간에 퇴근하기 시작한 게 14일째다. 그가 부서장이기 때문에 다른 직원들보다 일찍 퇴근하는 것은 아니다. 보리출판사는 지난 1일부터 오전 9시 출근-오후 4시 퇴근을 의무화했다. 이전보다 하루 근무 시간을 두 시간 줄였다. 사상 초유의 주 30시간 노동제를 시작한 것이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보리출판사 사옥. 보리출판사는 3월 1일부터 주 30시간 노동제를 시행하고 있다. /정원식 기자
보리출판사의 주 30시간 노동제 실험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됐다. 지난해 1월 출간된 <8시간 vs 6시간>(도서출판 이후)이 그것이다. 콘플레이크로 유명한 미국 식품회사 켈로그에서 1930년부터 1985년까지 시행된 하루 6시간 노동의 궤적을 살핀 책이다. 유 부장은 “지난해 상반기에 윤구병 대표가 직원들에게 이 책을 읽고 함께 토론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32명의 직원들은 5월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11월에는 조별 토론을 하고 조별로 발제문을 만들었다. 12월에는 전 직원이 모여 조별 토론 결과를 발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직원들은 윤 대표가 구체적으로 어떤 구상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경영지원실에서 일하는 안명선씨는 “토론 과정에서 켈로그의 주 30시간 노동을 우리 회사에서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 토론에서 논의한 내용이 실제로 실행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주 30시간 노동제 시행을 위한 구체적 논의가 시작된 건 올해 1월 ‘6시간제 실무추진팀’이 구성되면서부터다.
켈로그의 주 30시간 노동제도 경영진의 판단에서 출발했다. 켈로그는 1930년 12월 1일을 기점으로 시리얼 공장 근무를 기존의 8시간 3교대제에서 6시간 4교대제로 변경했다. 당시 사장이었던 루이스 존 브라운이 제안한 계획을 소유주 W.K. 켈로그가 받아들였다. 켈로그 경영진의 구상은 대공황 초입이었던 1930년 당시 기존 노동자들의 근무시간을 줄이고 교대조 하나를 추가해 켈로그가 위치한 지역도시 배틀크리크에서 더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하자는 것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시리얼 제조 회사를 세운 켈로그 소유주 W.K. 켈로그는 사회복지와 공공영역의 중요성과 여가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철학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루이스 존 브라운은 기업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해방적 자본주의’를 추구했던 인물이다. 보리출판사의 주 30시간 노동제도 윤구병 대표의 철학과 무관하지 않다. 윤 대표는 1995년 충북대 철학과 교수직을 던지고 생태적 사고에 기반한 교육·지역 공동체 운동을 위해 전북 부안에 변산공동체를 만들었다.
식품회사 켈로그 6시간 노동서 착안
주 30시간 노동제의 일차적 성과는 상대적으로 늘어난 퇴근 후 자기시간 확보지만, 보리출판사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목표는 자기계발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정원식 기자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임금은 어떻게 될까. 켈로그는 노동시간이 줄어들면서 감소한 임금손실분을 시간당 임금을 인상해 보전했다. 보리출판사는 주 30시간 노동제 도입을 논의하면서 임금삭감이 없다는 점을 미리 못박았다. 올해 임금협상에서 물가인상률을 반영한 임금인상이 결정됐기 때문에 임금 자체는 지난해와 비교해 올랐다. 특이한 것은 불가피하게 연장근로를 하게 될 경우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는 대신 휴가로 대체하도록 한 점이다. 보리출판사는 연장근로를 할 경우 초과한 시간만큼을 적립하고, 적립시간이 6시간 이상 될 경우 대체휴가로 사용하도록 했다. 다만 연장근로는 한 달에 18시간을 초과할 수 없도록 했다. 연장근로 시간은 직원 각자가 사내 인트라넷에 기록하도록 돼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근무시간 단축은 직원들 입장에선 누구나 환호했을 법하지만, 논의 과정에서는 이견도 나왔다. 실현가능성과 부작용에 대한 우려였다. 김로미 언론노조 보리출판사 분회장의 말이다. “처음 제안이 나왔을 때 노조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대표이사가 말한 얘기에 큰 틀에서는 동의했지만, 과연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경영자의 판단에 따라 하루 6시간 근무제를 도입해 경영이 어려워졌을 때 그 상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대표이사가 바뀐 후 6시간 근무제가 폐지되는 상황이 오는 것은 아닌가, 근무시간 단축으로 노동강도만 높아지는 것은 아닌가 등의 걱정이 있었다.”
시행 2주를 넘긴 지금 당장 드러나는 부작용은 없다. 직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주 30시간 노동제의 핵심은 일일 근무시간을 8시간에서 6시간으로 2시간 줄이는 것이다. ‘고작 2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변화에 대한 체감의 폭은 크다.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시간 활용의 여유다. 안명선씨는 지난해부터 서울의 한 대학 야간 학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다. 강의는 평일 내내 있다. 회사의 양해를 얻어 5시에 퇴근했지만 한 시간 일찍 퇴근하는 대신 한 시간 일찍 출근했다. 강의시간에 맞추느라 저녁을 제대로 먹은 적이 없다. 피로는 자연스럽게 축적됐다. 4시 퇴근으로 이제 그런 문제가 사라졌다. 영업을 맡고 있는 백봉현씨는 “2시간이 작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체험해보니 아주 큰 시간이더라”라고 말했다. 그가 주 30시간 노동제의 장점으로 꼽는 것은 출근에 대한 부담감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는 “덕분에 업무효율이 크게 상승했다”고 말했다.
업무시간 중 다른 직원들과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거나 잡담을 나눌 여유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업무량에 따라 자체적으로 연장근로를 했던 때와 달리 연장근로 시간을 기록하게 되면서 연장근로가 업무미숙의 징표로 비칠까 걱정하는 이도 있다. 또 하나의 걸림돌은 잡지 쪽 업무 조정이다. 보리출판사는 매달 두 종의 월간 어린이 잡지를 발행하고 있는데, 매달 마감을 해야 하는 잡지 업무의 특성상 마감 전 일주일 정도는 야근과 주말근무를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 30시간 노동제의 일차적 성과는 상대적으로 늘어난 퇴근 후 자기시간 확보지만, 보리출판사가 추구하는 최종적인 목표는 자기계발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주 30시간 노동제의 배후에 있는 철학은 가깝게는 일중독에 대한 반성이고 좀더 멀리보면 지역공동체에 대한 기여다. 요컨대 노동과 삶의 관계에서 그동안 노동에 밀려난 삶에 제자리를 찾아주자는 것이다. 조혜원 부장은 “2시간을 줄인 것은 단순한 사내복지 차원이 아니다. 이 시간을 공동체와 더불어 사는 데 사용하고 그런 정신을 퍼뜨리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출근 부담감 줄고 업무효율은 올라
보리출판사의 주 30시간 노동이 다른 기업으로 확산될 여지는 많지 않다. 저성장과 고용 양극화, 부실한 사회안전망과 높은 수준의 노동유연성이 결합된 노동의 약화 같은 문제가 심각한 대규모 제조업체는 물론이고 범위를 출판계만으로 한정하더라도 그렇다. 출판계의 일반적인 노동조건은 오히려 타업종에 비해 더 열악하다. 출판계는 대표적인 장시간 저임노동 업종으로 꼽힌다. ‘마흔이 넘은 편집자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편집자들의 근무수명이 짧고 이직도 잦다. 연장근로에 대한 수당이 지급되는 곳도 손에 꼽을 정도다. 노조가 있는 출판사도 5곳에 불과하다.
2009년 출범한 출판노동자협의회 대표를 지냈고 지금은 불안정노동철폐연대에서 활동하는 안명희씨는 “노동시간을 줄이려면 생산량을 줄여야 하는데 현재 출판유통 구조에서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수익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이라며 “보리출판사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주 30시간 노동제가 한 출판사의 실험일 수는 있지만 출판계 전반으로 확산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 출판계는 전반적인 불황으로 출판사들이 출간종수를 늘려 수익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업무량을 줄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보리출판사는 연간 25~30종의 책을 출간하는데, 30여명 규모의 출판사치고는 꽤 낮은 수치다. 이런 탓에 보리출판사는 주 30시간 노동제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김로미 분회장은 “우리만의 잔치처럼 비칠까 걱정스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켈로그의 주 30시간 노동제는 1985년 막을 내렸다. 총고용비용의 상승에 부담을 느낀 경영진과 노동시간을 늘려 더 많은 임금을 받으려는 노동자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제 막 걸음을 뗀 보리출판사의 주 30시간 노동제는 언제까지 지속될까. 전망하기에는 이른 시점이다. 지금으로서는 다짐을 굳힐 뿐이다. 조혜원 부장은 “잘 안착시켜 우리 사회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공론화하는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3171119441&code=92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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