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늙은 피아노의 회춘(回春)

2011. 10. 11. 07:59An die Musik

예술의전당 개관과 함께한 獨 스타인웨이 피아노 2대
名피아니스트들 사랑 받다가 24년 세월 속에 퇴물 돼버려 리사이틀홀로… 분장실로…
6000만원 '전신 성형수술'로 다음달 다시 태어나

조선일보 | 김경은 기자 | 입력 2011.10.13 03:30

'내 이름은 501610(일련번호). 1987년 독일 함부르크 스타인웨이사(社)에서 태어난 최고급 피아노다. 이듬해 1월 26일 동생 501660과 함께 대한민국 서울에 왔다. 당시 몸값은 7400만원. 오자마자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독차지하고 국내외 명(名)피아니스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새파란 후배들이 하나 둘 들어오면서 나는 리사이틀홀로, 분장실로 내몰렸다. 서글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공연장 피아노의 평균 수명(7~10년)을 감안하면 스물넷 된 나는 삭신이 쑤셔 소리도 크게 못 지르니까. 하지만 2011년 11월 다시 태어난다, 전혀 새로운 나로.'

↑ [조선일보]

↑ [조선일보]지난 10일 경기도 용인시 작업장에서 조율사 정재봉(오른쪽 건반 뚜껑 들고 있는 사람)씨와 동료들이 예술의전당에서 24년간 사용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수리하기 위해 부품을 하나씩 떼어내고 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예술의전당 (사장 김장실 )이 88년 개관부터 함께한 피아노를 싹 뜯어고친다. 탈이 날 경우 독일 본사로 보내거나 국내에서 부분 수리한 적은 있어도 전체를 통째로 갈아치우는 건 국내 공연장 역사상 처음. 음향판 수리, 튜닝핀·줄 교체, 내·외장 도색, 조정 및 정음에 대략 한 달이 소요된다. 예상 수리비는 부품값 4500만원과 수리비 1500만원을 합쳐 전부 6000만원.

24년 만에 전신(全身) 수술

오래될수록 명품 대접을 받는 현악기와 달리 피아노는 '퇴물' 취급을 받는다. 처음에는 맑고 영롱했던 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가벼워지고 울림도 짧아진다.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5년 이하 젊은 피아노를 선호한다.

예술의전당에는 모두 8대의 피아노가 있다. 그 중 610과 660은 전당 개관 때 음악당에 들어온 원년 멤버다. 처음부터 콘서트홀에서 사용됐던 610은 자신의 피아노를 직접 짊어지고 내한했던 크리스티안 침머만만 빼고, 미하일 플레트네프·스타니슬라프 부닌 등 대가들의 손을 두루 거쳤다. 610은 음량이 크고 음색이 밝아서 힘찬 연주가 특징인 백혜선씨가 애호했다. 660은 건반이 묵직하고 손에 달라붙는 느낌이 있어 합창단 반주용으로 주로 쓰였다. 하지만 온·습도 조절장치가 없는 뒷방에 있다보니 가운데가 둥글게 솟아 있어야 할 음향판은 푹 꺼지고 해머도 뒤틀렸다.

지난 5월 전당 사업본부는 새 피아노를 구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대당 가격만 2억4000만원. 610과 660이 오래됐지만 타고난 품질은 최상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종열·김두회·정재봉씨 등 전담 조율사 3명에게 수리가 가능한지 물었다. 대답은 모두 "예스(Yes)!" 지난달 말 전국의 조율사들을 대상으로 공개 입찰을 진행했고, 정재봉(55)씨에게 책임을 맡겼다. 독일에서 피아노 조율과 음향학, 재료학을 공부한 정씨는 독일 국가공인 피아노 제작자 자격증인 '클라비어바우어(Klavierbauer)'를 땄고, 명문 쾰른국립음대에서 11년간 조율사로 일했다. 98년부터 14년째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 구조 및 관리' 강좌를 맡아 매학기 가장 먼저 마감을 기록하는 스타 강사이기도 하다.

부품은 전당이 독일 본사에서 직접 공수해 다음주쯤 넘길 예정이다. 구입 대신 수리해서 남는 돈(1억8000만원)으로는 하프와 팀파니, 실로폰 등 악기를 사기로 했다.

연주용 복귀 가능성은

지난 10일 오전 경기도 용인시 신갈동의 한 피아노 수리 현장. 조율사 정재봉씨가 동료 양홍용(32)씨와 함께 뼈대만 남은 그랜드 피아노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흘 전 예술의전당에서 트럭에 실려온 길이가 2m74㎝에 달하는 610과 660이었다. 몸체에서 분리된 뚜껑과 건반(88개) 덩어리, 가늘고 굵은 줄(243개)은 바닥에 놓였다. 정씨가 조율용 망치를 한 번 내리칠 때마다 몸통 구석구석에 박혀 있던 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100% 수작업 공정이어서 수리를 해도 콘서트홀에 복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반적으로 전성기의 80% 정도가 최대치이기 때문이다. 정씨는 "200개가 넘는 줄과 해머를 0.1㎜ 이하 오차로 끼워넣을 걸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아프지만 30년 고생하며 배운 경험을 전부 구현하겠다"고 했고, 전당은 "수리 결과가 좋으면 연주용으로 컴백시킬 방침"이라고 밝혔다.


출처/원문 보기 : 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26&newsid=20111013033033199&p=chos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