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6. 24. 07:44ㆍ이런저런...
인간이 만든 종교가 인간 잡아먹는 역설적 운명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도 부처도 보는 영성으로
18일 심도학사 개원식에서 강연하는 길희성 원장
이슬람의 한 수피(Sufi) 영성가는 말하기를 처음 카바(Kaaba)-메카에 있는 검은 돌이 안치되어 있는 곳으로서, 무슬림 순례자들이 반드시 참배해야 하는 성소-를 방문했을 때는 카바만 보고 하느님은 만나지 못했고, 그 다음에 갔을 때는 카바와 함께 하느님을 보았으며, 마지막 세 번째 방문에서는 카바는 사라지고 하느님만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이슬람뿐 아니라 모든 종교의 신앙생활과 영성의 핵심을 드러내주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나아가서 인류 종교사의 향방을 말해주는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이 수피의 고백을 인간의 신앙생활 내지 영성(spirituality)의 세 단계를 나타내는 말로 다소 자유롭게 확대 해석하면서 심도학사를 개원하는 오늘 저의 강연을 하고자 합니다.
이슬람 한 수피 영성가가 고백한 세 가지 영성 단계
이 수피가 말하고 있는 카바 참배는 모든 무슬림들의 평생소원이자 종교적 의무 가운데 하나인 메카 순례의 핵으로서, 이슬람(Islam)이라는 종교의 가시적 측면, 즉 이슬람의 전통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카바일 필요는 없고, 쿠란(Quran)이나 라마단(Ramadan)일 수도 있고, 타 종교로 말할 것 같으면 미사나 기도, 혹은 인간 예수님이나 부처님 같은 존재, 성경이나 불경 같은 경전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영성을 촉발하고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을 매개해주는 종교의 외적 요소들은 무수히 많으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이런 구체적인 매개체가 없이는 종교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영적 체험은 텅 빈 진공상태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나 집단이 특정한 시대, 특정한 지역에서 접하게 되는 영적 경험의 매개체 내지 촉발제를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매개체를 종교적 상징(symbol)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수피가 처음 카바를 방문했을 때 하느님은 보지 못하고 카바만 보았다는 말은 그가 종교의 외양적 모습, 즉 카바라는 이슬람 종교의 상징만 보았을 뿐 정작 이 상징물이 매개해주는 초월적 실재, 즉 상징의 존재 이유인 하느님을 만나는 경험은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선불교 식으로 말하자면 달은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다가 돌아온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비단 이 수피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신앙인들이 실제로 이러한 수준의 신앙생활에 머물고 있습니다. 한 특정 종교의 외적 상징들을 접하고 배우며 그 종교의 의례를 관습적으로 준수하는 행위를 신앙생활로 오해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한겨레 자료사진.
모든 종교는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실재를 매개해주는 보이는 것들을 상징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한 종교적 전통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 - 신화, 교리, 의례, 성전과 성상들, 성인이나 성직자들 - 은 모두 초월적 실재를 가리키고 매개해주는 상징들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신앙인들은 종종 이 사실을 모르고 상징이 실재 그 자체인 줄 착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상징이 상징임을 모르고 절대적 실재 자체로 간주하고 절대화합니다. 이것이 상징의 고착화, 물상화, 우상화라는 것입니다.
상징의 존재 이유는 어디까지나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을 매개해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상징을 절대화하고 숭배하고 집착하면서, 이것을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종교에 의한 인간 소외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상징을 우상화해서 정작 상징을 만들어 낸 인간이 상징의 노예, 전통의 노예, 종교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우상숭배(idolatry; idol, image의 숭배라는 뜻)이며, 이 종교적 우상숭배는 세속적 가치를 숭배하는 우상숭배 못지않게 위험합니다.
예수도 “안식일 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안식일”
원효 스님의 글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술사가 기가 막힌 호랑이를 마술로 연출했는데 이 호랑이가 되레 그 마술사를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것이 종교를 포함해서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 모든 이데올로기, 모든 종교의 역설적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월적 경험을 통해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가 인간을 구속하고 인간 소외를 조장하는 무서운 기재로 작용하게 되는 역리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가장 자유롭게 해야 할 종교가 인간의 정신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둔갑하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와 법 - 세속의 법이든 종교의 율법이든 - 이 다 이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 필요해서 만든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을 묶는 속박과 억압의 기제로 변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실로 위대한 인간 해방의 선언임에 틀림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이 수피의 신앙과 영성도 처음에는 종교적 우상숭배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멀고먼 순례 길을 천신만고 끝에 가서는 정작 하느님은 만나지 못하고 카바(종교의 외적 측면: 상징, 전통)만 보고 돌아온 것이지요. 사실 대다수 인간들의 신앙생활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자기가 태어난 집안의 전통이기 때문에, 혹은 우연히 접하게 된 한 종교의 외형적 모습에 이끌리거나 호기심을 가지고 종교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그 종교의 전통과 상징들을 하나씩 배워나갑니다. 경전을 읽고 공부하며 성직자들의 설교, 설법, 강론을 듣기도 하면서 자기 종교 전통에 대한 견문과 지식이 풍부해집니다. 하지만 이 단계는 자칫 상징 자체에만 머물지 그것이 가리키는 초월적 실재를 보지 못하는 단계가 되기 쉽습니다. 상징을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는 나머지 거기에 빠지거나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손가락만 쳐다보고 정작 달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 성경을 읽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불경을 읽어도 부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문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종교를 사랑하고 집착하는 것이 신앙이고 하느님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문자주의적 사고에 젖은 현대인들이 만들어 낸 경직된 사고
신앙인들이 상징의 상징성을 간과하고 상징을 절대화하며 거기에 매달리는 데는 두 가지 근본적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문자주의(literalism)입니다. 경전이나 교리의 문자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임을 모르고 마치 언어와 문자가 초월적 실재나 초월적 경험을 그대로 표현하고 전달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상징적 성격을 지닌 종교적 언어의 속성을 모르고 문자적으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성한 경전이나 성인의 말씀이라 해도 언어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일상적 사물과 세계에 관계된 것이며 거기서 유래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나 개념들은 무한한 실재나 초월적 세계를 나타내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하느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부정신학(theologia negativa) 혹은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통해서 하느님의 불가언적 신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노자 도덕경의 유명한 첫 구절,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말도 이를 말해주고 있지요.
하지만 문자 문화에 익숙하고 과학적 사고와 사실적 언어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오히려 종교적 상상력이 부족하고 문자를 상징이 아니라 사실적 언어(factual language)로 간주하기 쉽습니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발호하고 있는 이른바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그 좋은 예입니다. 경전의 문자를 하느님 자신처럼 절대시하고 숭배하다시피 하는 근본주의는 고대나 중세보다는 오히려 현대의 산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편화되고 과학적 지식과 각종 자유주의 사상이 만연하고 있는 현대 세계와 근본주의는 얼핏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근본주의 신앙은 문자주의적 사고에 젖은 현대인들이 만들어 낸 경직된 사고의 산물입니다. 문자문화가 보편화되지도 않았고 문자 이외의 다양한 언어 ― 예를 들어 각종 의례ritual 나 전례, 조각이나 건축, 음악, 무용, 축제, 연극, 순례 행위 등 ― 를 통해서 초월의 세계를 접했던 고대나 중세 시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문자주의나 근본주의 신앙의 유혹이 현대인들보다 훨씬 적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와 쿠란의 신격화, 계시 종교의 병폐
신앙인들이 상징 그 자체에 매달리게 되는 둘째 이유는, 한 종교의 교리 자체가 상징의 상징성을 거부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성과 속, 절대와 상대, 무한과 유한,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해주는 전통, 즉 상징체계의 어떤 부분을 절대화하고 초월적 실재 자체와 동일시함으로써 그 상징의 상징성을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주로 계시종교, 즉 상징이 하느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 유일신 신앙의 종교에서 문제가 됩니다. 특히 기독교의 예수, 이슬람의 쿠란이 문제가 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화, 이슬람에서 쿠란의 신성화가 대표적 예에 속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초월적 사랑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매개해주었던 갈릴리 청년 예수가 교회의 오랜 교리화 작업 ― 정통 기독론(Christology)과 삼위일체(Trinity) 신론의 형성 ― 을 통해서 점점 더 절대화되어 마침내 하느님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졌고 하느님 자신과 동등한 실재로 간주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엄격한 유일신 신앙에 입각해서 그리스도교의 예수 숭배와 삼위일체 교리를 비판하던 이슬람도 쿠란의 영원성과 초월성을 교리화 함으로써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를 범했습니다. 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무슬림들 못지않게 성경의 문자적 진리를 강조하면서 성경을 숭배합니다. 이 두 경우 모두 인간 예수 자신이나 예언자 무함마드 자신의 생각이나 신앙과는 무관하게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할 위험성은 그리스도교나 이슬람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 다 존재합니다. 절대적 실재, 성스러운 실재를 매개해주는 상징 자체가 어느 정도 신성성을 지니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상징이 절대화되고 숭배의 대상으로 변할 때 상징의 존재이유는 사라지며, 그러한 상징에 집착하는 종교는 결국 독선적이고 배타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상징에 집착하는 종교는 결국 독선적이고 배타적으로
부처님의 설법에 유명한 뗏목의 비유가 있지요. 어떤 사람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넌 후에 이 뗏목이 아주 좋았다고 생각해서 짊어지고 다니는 우를 범하면 되겠냐는 설법입니다. 즉 부처님의 말씀도 일단 사용하고 나면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한참 설법을 하신 후 말씀하시기를 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고 모두 취소해버리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에서든 전통의 권위가 신의 권위와 혼동이 되고 상징과 실재가 동일시되는 매우 위험한 일이 벌어집니다. 종교에서 전통의 절대화는 최대 유혹이고 위험입니다. 종교의 우상숭배는 세속적 우상숭배를 능가하는 해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피 영성가는 두 번째 카바 방문에서 이런 위험을 극복했다고 고백합니다. 영성의 다음 차원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상징 고착증과 절대화와 종교적 우상숭배의 덫을 벗어나 카바도 보고 하느님도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는 카바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초월의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생활에서 가장 정상적인 일이고, 본래 그래야 되는 일입니다.
초월을 매개해주는 상징 없이 영적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계속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특정 종교 전통의 상징체계 속에서 그것을 매개로하여 초월적 경험을 하는 영적인 삶을 영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며, 무슬림들은 쿠란을 통해, 그리고 불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을 통해 부처님의 마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상징적 전통을 절대화하고 고수하려 하면 광신주의로
문제는 상징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종교 생활의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신자들이 자기 종교의 상징적 전통을 절대화하고 고착화 시키며 상징체계로서의 종교에 의해 비인간화되고 노예화된다는 데 있습니다. 상징이 상징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수많은 현대인들은 자기가 속한 종교의 경직되고 편협한 상징체계에 질리거나 질식감을 느끼고 탈출하고자 합니다. 전통적 상징체계에서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에 냉담하거나 종교를 떠나버리거나, 종교 대용물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종교와 담을 쌓는 철저한 세속주의의 삶을 삽니다. 탈종교 시대인 현대 세계에서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처한 위기입니다. 그럴수록 전통을 절대화하고 고수하려는 보수주의, 근본주의, 광신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기 쉽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돌파구는 세속주의도 아니고 경직된 전통주의도 아닌 제 삼의 길에 있을 것입니다. 상징을 상징으로 알아서 상징의 고착화를 벗어나고 낡은 상징적 언어를 현대인이 알이 들을 수 있는 새로운 언어로 자유롭게 재해석하거나 바꾸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종교의 현대주의자(modernist)들이 추구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쉴라어마허(F. Schleiermacher) 이후 현대 개신교 신학이 줄곧 해온 작업이며 이를 통해서 수많은 현대 지성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의 경우도 1960년대 초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신학의 문을 과감히 열어 현대의 시대정신과 대화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현대 이슬람이 처한 위기의 일부는 이러한 ‘이슬람적 현대주의’ 내지 ‘현대주의적 이슬람’의 세력이 매우 미약하다는 데 있습니다.
개방적이고 풍요로운 다원적 영성의 세계가 열리는 길
하지만 탈종교 시대의 영성은 이러한 현대주의자들의 선택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대주의자들은 아직도 한 종교에만 머무는 신앙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탈종교 시대의 영성은 현대화 작업보다도 더 과격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저는 이것을 수피 영성가가 제시하고 있는 세 번째 단계의 영성에서 찾고자 합니다. 즉 카바는 사라지고 하느님만 남는 영성의 단계입니다. 상징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하느님만 남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영성의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차원의 영성을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상징이 상징임을 아는 사람에게는 자기 종교의 상징뿐 아니라 타 종교, 이웃 종교의 상징에도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게 됩니다. 사실, 문자주의적 신앙 이해를 고집하는 한 진리는 오직 자기 종교밖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배타주의는 당연한 것입니다. 문자로 이해한 종교들은 교리와 사상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차원에서는 모든 종교가 다 옳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단 상징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상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지금까지 한 종교의 상징체계를 통해 영적 생활을 하던 데서 벗어나 자유롭게 타종교들의 상징을 접하고 배우면서 영적 생활을 할 수 있는 개방적이고 풍요로운 다원적 영성의 세계가 열립니다. 자기 종교의 언어와 전통을 주로 배우고 사용하되, 다른 종교들도 자유롭게 섭렵하면서 영적 자양분을 흡수하는 종교다원적 영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종교적 상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모든 사물, 모든 경험이 종교적 경험이 되는 그야말로 “초종교적 영성”이 열릴 수도 있습니다. 종교 다원적 영성마저 넘어서 종교와 비종교, 하느님과 세상, 세간과 출세간의 구별마저 초월하는 영적 경지가 열리는 것입니다. 굳이 종교적 상징만 초월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경험을 통해서도 깨달음과 지혜를 얻고 하느님을 만납니다. 종교와 비종교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만나고 부처를 보는 경지가 열립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초월의 상징이 되며 세상의 시끄러운 언어나 다양한 경험이 모두 초월의 통로가 됩니다. 하느님 혹은 절대적 실재에 종교와 비종교, 성과 속, 진과 속의 이원적 구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종교가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은 기독교 신자도 아니고 불교 신자도 아닙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
이렇게 하느님을 만나 종교적 상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면, 종교와 비종교 성과 속, 진과 속, 세간과 출세간, 하느님과 세상, 자연과 초자연의 이원적 대립 자체를 초월하는 문자 그대로 초종교적 영성이 열립니다. 종교 아닌 종교의 세계가 열리고 하느님 너머의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니, 하느님마저 떠나는 영성의 세계가 열립니다.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는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대담한 발언은 이러한 경지를 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누가 나더러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살기 위해 산다고 대답하겠다고 말합니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평상심이 도가 되는 경지입니다. 종교적 상징만 하느님을 만나는 상징이 아니라 만물이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상징이 되고 하느님의 빛, 부처님의 광명으로 빛나는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나고 죽는 것, 먹고 자는 일, 존재하고 사랑하는 순간 하나 하나, 그리고 참되고 의롭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는 삶 자체가 종교적 삶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가 필요 없고 심도학사 같은 별도의 공간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두 가지 의미의 초종교적 영성, 즉 종교들 사이의 담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다종교적 영성, 그리고 종교와 비종교, 성과 속, 진과 속이 하나가 되는 초종교적 영성이 인간의 정신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적 경지라고 믿으며, 이러한 초종교적 영성이야말로 탈종교 시대를 사는 현대인이 추구해야 할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러한 영성이 오늘 출범하는 심도학사가 지향하는 영성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곳에 모인 여러분의 동참을 호소하면서 저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출처/원문 보기 : http://well.hani.co.kr/2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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