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16. 14:29ㆍ괜찮은 글
현대인은 정말 필사적이라 할 만큼 노력하고 있다. 유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영어와 입시와 취직 시험에 완전히 소진하고 있다. 이 꽃다운 시기의 생명이 피워내는 아름다움의 결정체를 무엇을 위해 그토록 학대하는가?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남한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제 밥벌이는 하기 위해서···.
그래 가지고 사회에 나오면 목적은 이루어지는가? 또다시 경쟁이고, 줄 세워진 서열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한, 그리고 하나라도 위로 올라가기 위한, 현재 삶의 희생이다. 아니, 학살이다.
[김영종의 '잡설'·24]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②
이런 놀이를 영속하려면 빚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갚기로 한 약속이 무한히 유예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말한 존 로는 천부적인 수학 계산능력을 발휘해 '약속의 무한 유예'를 가능케 하는 지폐 경제 체계를 구상, 이 아이디어를 프랑스에서 실현했다.
현대 금융은 바로 이 존 로의 구상에 기초한다. 그는 경제의 시간을 현재에서 미래로 옮겨놓았다. "지금 당장 금은보화가 없더라도 국가는 미래의 수익을 근거로 화폐를 발행하여 국고를 채울 수 있다"는 존 로의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시간 개념의 변경이 전제되어야 했다. 신용은 미래의 시간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용의 본질은 현재의 위기를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연기하는 데 있다. 신용 체계 아래서 자본의 자기 운동은 저축을 위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지불 결제를 기약 없이 연기하려는 절망적인 요구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그 결과, 지불 결제를 계속해서 무기한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차이(잉여가치)를 보장하기 위해서 자본의 운동은 끊임없이 차이 짓기를 필요로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기술 혁신이 진보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진보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자본 운동의 한 결과로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본의 운동은 더 이상 단순히 이윤 창출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아니고, 지불 결제를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것이다. 끊임없는 차이 짓기의 과정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시간성은 결코 무한한 미래를 향한 진보가 아니며, 기약 없는 미래로 지불 결제를 끊임없이 연기하는 것이다." (<은유로서의 건축>,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재희 옮김, 한나래 펴냄)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이란 이런 것이다. 현대인은 정말 필사적이라 할 만큼 노력하고 있다. 유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영어와 입시와 취직 시험에 완전히 소진하고 있다. 이 꽃다운 시기의 생명이 피워내는 아름다움의 결정체를 무엇을 위해 그토록 학대하는가?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남한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제 밥벌이는 하기 위해서···.
그래 가지고 사회에 나오면 목적은 이루어지는가? 또다시 경쟁이고, 줄 세워진 서열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한, 그리고 하나라도 위로 올라가기 위한, 현재 삶의 희생이다. 아니, 학살이다. 당신은 임종을 맞아 당신의 삶이 학살당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학살하는 의지를 '인간이 취할 가장 훌륭한 태도'라고 교육받아왔으니까. 그래서 당신은 기꺼이 노예가 되었으며 임종 때 더 노예이지 못한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며 죽어가는 것이다. 역사상 어느 노예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노예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노예. 이것이 현대인의 자화상인데, 주님 앞에 노예이기를 간청하는 것과 같은 종교적인 트랜스 상태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 종교의 이름은 '역사의 진보'라는 종교다. 자본의 운동이 만들어낸 진보 이데올로기는 시간의 진행 방향 자체를 바꾸어버렸으며 동시에 현재를 거세해버렸다. (시간의 방향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겠다.) 전 세계가, 전 사회가, 역사의 진보를 향해 엔진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인류는 역사에 갇히고 기약 없는 미래에 농락당하고 있다.
이때의 역사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나아가서 신의 능력을 가지려는 이른바 문명의 역사다. 이 불가능한 일(역사 속의 유토피아)은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과 궤를 같이한다. 전자(역사 속의 유토피아)는 최대다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행복주의적) 성격을 띠며, 심지어 공산주의가 붕괴된 원인도 이러한 행복주의를 거슬렀기 때문이다. 월러스틴은 공산권의 붕괴 원인이 사회에 작동되고 있는 '가치법칙'과는 다른 논리로 국가를 운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토피스틱스>,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백영경 옮김, 창비 펴냄)
행복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의 원리인 가치법칙에 아주 잘 호응하는 철학이다. 자본주의에서 최고 가치로 내세우는 자유는 행복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로,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되는 자유를 뜻한다. 그러나 "자유는 행복을 배제하는 데에 존재한다"(칸트). 행복주의의 행복은 이익이다. 자유는 나의 이익을 참고 함께 사는 사회(타자)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가치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자유를 자유라 한다면 우리는 모두 호모에코노미쿠스(=경제적 동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다. 우리가 믿고 있는 '역사의 진보'는 인간이 미래를 위해 살도록 하면서 행복을 미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이데올로기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이 돈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돈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아는 지름길이다. 이 돈 위의 삶은 다른 말로 하면 어떤 무엇인데, 이제 그 무엇-진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김용철 |
다시 한 번 '진보란 무엇인가?' 사례나 종류가 아닌 그것들에 공통된 것으로서의 진보를 말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개별의 꽃에 대해서는 몰라도 꽃들에 공통된 것으로서의 꽃에 대해서는 알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스승인 플라톤은 <메논>에서 상기로써 가능하다고 설파했다. <메논>은 "덕이란 가르쳐질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놓고 소크라테스와 메논이 대화한 내용을 뒷날 플라톤이 기록한 책이다.
소크라테스는 덕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쳐질 수 없고 오직 상기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이때 상기는 전생(前生)에서 배운 것을 상기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놀랍지 않은가. 갑자기 웬 전생? 잘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합리적인 방법과 공정한 규칙에 의해 규제되는 기술'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영혼불멸과 윤회 사상'의 근거인 '전생'을 이 기술, 곧 문답법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른바 증명의 기술이 증명 불가능한 것(=형이상학)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도 마찬가지로 진보를 형이상학(=증명 불가능한 것)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할 수 있으면 해보시라. 증명 불가능한 것에 의존하지 않고 증명하기 위해 서양 철학은 2500년 동안이나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괜히 헛수고하지 말고 국어사전에 나온 대로 진보를 말해보자. ①정도나 수준이 나아지거나 높아짐. ②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 이게 진보라고? 이것은 진보의 겉, 즉 형식만을 설명하는 것이다. 내용이 빠져 있으니 엿장수 마음대로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좌파 또는 우파의 간판을 내걸고 사회 발전을 위한답시고 싸우지만 당연히 결론은 아전인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를 알려면 반드시 먼저 '덕이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산파술(maieutikē)이니 비판적 검토(elenchos)니 대화법(dialektikē)이니 온갖 장기를 다 부려서 알아낸 결과가 무엇인가? '덕은 앎이다'라는 것이다. 얼마나 옹색한가? 덕은 덕이고 앎은 앎인 거지, 어떻게 생각했기에 이런 결론을 냈을까?
그 과정을 한번 들여다보자. ①덕은 뛰어난 것이다. ②뛰어난 것은 유익한 것이다. ③그러므로 덕은 유익한 것이다. ④그런데 유익한 것은 앎이다. ⑤그러므로 덕은 앎이다. 여기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다만, 앎으로 귀결됨으로써 덕의 내용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애당초 덕의 내용은 사례와 종류임에도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거부하고 공통된 본질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저 유명한 방법론—대화법, 산파술, 비판적 검토—을 세상에 확고부동하게 정초하기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까지 버리면서.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아무래도 찜찜했던지 다시 질문을 던진다. "앎이라면 당연히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누가 덕을 가르쳤거나 가르치고 있는가?" 아무도 가르친 적이 없었고 또 없기 때문에 다시금 덕은 가르칠 수 없는 것이고, 오직 참된 확신을 통해서만 덕을 가질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면 이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신적인 섭리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메논이 던진 최초의 질문('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에 대한 최후의 답인데,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처음 시작할 때 "덕은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칠 수 없고 오직 상기해야 한다"고 메논을 설득했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최초의 답과 최후의 답을 가장 적절히 정리해 이해하면 아래와 같다.
덕을 가지려면 전생에서 배운(또는 얻은) 내용을 상기해야 하는데, 이 내용은 지식이 아닌 믿음(확신)으로 되어 있으며 이 믿음을 얻는 경위는 신적인 섭리에 따라서이다.
여기서 분명해진다. 내용을 알려면 확신과 신적인 섭리를 통해야 하고, 내용을 잘 알려면 대화법(논리적 형식)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먼저 덕이 무엇인지를 규정'하자고 제안하고 그렇게 하기로 동의를 받아낸 뒤 계속 비판적으로 검토해나가는데, 그 결과 덕이 수식어('잘' '확연히' 따위)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메논에게 덕은 내용의 문제이고, 소크라테스에게 그것은 방식의 문제다. 덕은 무엇을 행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메논에게 있어 모든 것에 공통되는, 한 가지 의미의 덕은 없다. 다양한 종류의 덕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덕은 부사적('잘' well)으로 기능한다. 그것은 다른 여러 활동을 한 가지 의미로 수식한다. 소크라테스는 메논이 그 한 가지 의미를 찾도록 돕는다." (박재주, '플라톤의 <메논>에 나타난 도덕교육론', <서양의 도덕교육 사상>, 청계(휴먼필드) 펴냄)
부사적으로 기능하는 것은 다름 아닌 덕의 수행 방식에 대한 강조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대화 목적은 본질을 탐구하는 것인데도 그 귀결점은 내용의 수식('잘' well)이 되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 방식의 아이러니다.
"소크라테스는 증명을 하나의 대화로 도입하면서 동시에 대화 그 자체의 본래 목적을 제거해버림으로써 그 이전의 체계를 견고하게 만들었다"고 가라타니 고진은 말한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체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소크라테스 방식이며―바로 '잘'이다. '덕' 대신 '진보'를 대입시켜도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똑같다.
본질로서가 아닌 쓰임에서 보면 진보는 '역사의 진보' 아래에서만 생명을 부지한다. 역사의 진보는 '역사는 자연을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라는 근대적 역사관 그리고 문명관에 입각해 있다. 역사 속에서 이룩한 진보는 자연을 정복한 대가, 즉 문명화를 뜻한다. 진보의 이념 아래 인간은 자연을 분리해낼 뿐 아니라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는데, 이를 실현시키는 힘은 '이성'에 있다.
진보가 추구하는 이상은 이성의 힘으로 사회와 자연을 재-디자인하는 것이다. 진보는 애초에 유대-기독교의 엘리트들이 창안한 개념이다. 이들만이 유일하게 여느 종교와 달리 '직선의 시간관'을 사용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이야기할 것이다).
근대적 진보의 역사적인 출발은 유대-기독교적 시간관이 르네상스기에 그리스ㆍ로마의 고전문화를 만나 물질세계까지 장악하기 위해, 즉 이성의 힘으로 사회와 자연을 재-디자인하기 위해 거듭 태어난 '직선의 시간관'에 있다. 다시 태어난 진보는 '천국' 대신 이성에 의해 운영되는 이상적인 사회로서 '유토피아'를 제시했다. (계속)
출처/원문 보기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00716074949§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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