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치 사운드’ 고군분투기

2008. 12. 29. 20:58오디오&AV

김갑수 시인, 문화평론가 dylan@unitel.co.kr

 

[신동아]

김갑수 시인의 작업실 ‘줄라이홀’

출판사 다니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야, 너 마누라랑 이혼했다며? 스물여섯 살짜리하고 재혼해서 룰루랄라 산다며? 오호호호!”

“엥?”

일단 그 친구는 여자다. ‘오호호호’ 하는 반응으로 보아 그럴 리가 없다는 표시다. 그런데 소설가 김훈에게서 들었단다. 세상에나. 김훈이라면 왠지 분위기가 진득한 게 헛말 따위는 절대 하지 않을 것 같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인간이 ‘남한산성’의 말씀에 ‘오홍!’ 했을라나. 평소 그와 척진 일도 없었으니 어딘가에서 헛소리를 건네 들었을 것이다. 마누라 직장에 곧장 전화를 걸었다.

“헤이, 나 당신하고 이혼했대. 스물여섯 살짜리 꼬셔서 잘 산대. 작업실이 집이래.”

아내의 답변은 언제나 간단명료하다.

“축하해. 근데 집에도 좀 오고 그러시지.”

결혼한 자가 별 이유도 없이 집 놔두고 작업실에서 거의 산다. 이혼 소리가 돌 법도 한 것 같다. 스물여섯 살짜리는 몰라도 아내와 ‘웬수’ 사이에 속칭 ‘딴 년’을 숨겨놓고 있으리라는 추측들. 하지만 그건 독신자를 동성애자로 간주하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너무나 기계적인 연상이고 편견이다. 실상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은 덕택에 아내와 나는 서로 그리워하며 산다. 그리움이 사무치면 집에 들어가서 잔다. 그게 일주일에 두어 번쯤인데, 왜 그래야 하느냐고?

동거 혹은 별거

몇 해 전 일본의 어떤 중학생이 학교 앞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기자들 앞에서 녀석이 했던 말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나요?”

‘하류지향’을 쓴 우치다 교수 같은 훈고파는 “죽기 직전까지 녀석의 목을 졸라보면 왜 안 되는지 알 것이다”라고 했다. 우치다는 세계의 ‘이쪽’에 소속된 사람이리라. 그는 ‘저쪽’의 언어와 사고를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을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나도 이런 말은 할 수 있다.

“왜 부부는 언제나 붙어 지내야만 하나요?”

이런 반문이 별문제 없는 부부의 간헐적 동거, 선택적 별거에 대한 변이 될까? 되거나 말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는 직장에서 돌아온 뒤의 시간 전부를 책 읽는 데만 쓴다. 구경시켜주고 싶을 만큼 필사적이다. 물론 살림은 도통 하지 않는다. 가령 밥은 원하는 사람이 해서 먹고 씻어놓아야 하고, 단추가 떨어지면 세탁소에 가는 식이다. 불만? 물론 나로서도 왕 같고 성주 같은 세상의 남편들이 부럽다. 이청준 선생과 여행 중이었는데, 밥도 안 해주는 마누라 섬기는 자랑을 했더니 사근사근 온화한 노작가께서 주위가 놀랄 만큼 큰소리로 발끈한다.

“기럼 × 빨라고 장가갔냐?”

역시 이해불능이다.

1클랑필름 사의 오이로다인 2오이로다인 필드 전원부 3웨스턴일렉트릭 16575 파워앰프 4프리앰프 마이학 101

죽기살기, 그리고 생의 목적

아내는 하고 싶은 일을 꼭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런 성격 앞에서는 존중을 가장해 항복하는 편이 정신과 육체 건강에 모두 유익하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갸륵한 미담의 주인공? 천만의 만만의 말씀. 거래는 냉정한 것이다. 배려받지 못하는 만큼의 자유가 내 몫으로 주어진다. 더욱이 나 또한 아내 못지않은 강도로 하고 싶은 것을 꼭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배냇병이로다, 아이도 어쩌면 그리 똑같은지!).

아내의 책이 내게는 음악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할 일은 독서와 음악 감상이다. 우아스럽고 교양스럽지 않은가. 그러나 웬걸. 당사자들에게 그 짓은 우아, 교양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나에게 음악은 비둘기가 노래하는 가정음악실의 선율이 아니다. ‘죽기살기.’ 무슨 업보인지, 내게 음악 듣기는 날마다 죽기 살기 같은 전투적 집중에 해당한다. 과장하자면 매혹적인 범죄, 불가항력적인 질환의 대체물쯤 된다. 비포(before) 결혼에서 애프터(after) 결혼까지 한평생 그래왔다.

결혼하고 3년쯤 별도 공간 없이 ‘가정’에서 음악을 들어봤다. 그건, 피차간에, 그러니까, 고문이었다. 내 방식은 스위트홈에 어울리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것을 꼭 해야만 하는 성정을 똑같이 보유한 부부. 타협책은 집 밖에 결혼 전과 비슷한 공간을 따로 장만하는 거였다. 서로 그리워하는 부부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설의법적 명제.

“왜 부부는 언제나 붙어 지내야만 하나요?”

지금 거주하는 마포의 줄라이홀은 결혼 후 네 번째로 마련한 작업실 공간이다. 상용건물 지하 한 층을 통째로 전세 내 본격적인 음악감상실로 공사했다. 주변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말해준다. 로망이라나. 뭐 그런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로망, 그 단어는 너무 한갓진 느낌이 든다. ‘생의 목적’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거창할까. 중년기 정서치고는 유치해 보이겠지? 그런들 어쩌랴. 줄라이홀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한 사내의 생의 목적이다.

무언가가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어떤 위치로 올라가거나 무엇을 획득할 수 있었다면 그 역시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악을 들어야 했다. 음악에 포개어진 삶은 무엇이 되거나 획득하거나 올라서는 것을 언제나 가로막았다. 팔자려니 해야 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하루하루 음악을 듣는 일이 삶이 되면 되는 거잖아! 먹고사는 일이며 모든 관계를 도구나 방편으로 삼으면 되잖아! 그 무엇의 잣대를 ‘이쪽’이 아니라 ‘저쪽’ 세계의 것으로 바꾸면 되는 것을.

나는 아무것도 못 된 것이 아니었다. 못 획득한 것도 아니었고 못 올라선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음악을 듣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조건을 많이 가졌다. 뒤늦은 깨달음이다.

줄라이홀의 일곱 아내

작업실 줄라이홀은 음악을 듣는 곳이다. 음악은 오디오를 통해서 듣는다. 자장면, 그거 먹어봐야 맛을 아는 건데 블랙누들이라고 이름밖에 모르는 서양인에게 그 오묘한 맛을 이해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오디오가 그렇다. 시스템을 구성하는 여러 부문을 다양하게 조합해가며 소리를 만드는 것이 오디오질인데 그 맛은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이해 불능일 것이다. 감히 말한다. ‘죽기 전에 꼭 해보아야 할….’ 운운의 버킷 리스트가 유행이던데 죽기 전에 오디오 한번 해봐야 한다. 거기에 생의 ‘저쪽’이 있다.

가치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쪽 세계에서 의미 있고 중요하고 훌륭하다고 치켜 올리는 것들이 소리세계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대신 50헤르츠 이하를 커트하는 게 나은지, 2000헤르츠 대역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는지, 8000헤르츠 내외가 곱고 해상력이 높은지, 1만2000헤르츠 이상을 감지할 수 있는지, 뭐 그런 것이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줄라이홀’ 작업실의 김갑수 시인.

잠시 암호문을 낭송한다. 오디오 동네 사람이 아니면 건너뛰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 이름 복잡한 기기 얘기다. 내가 보유한 시스템들 가운데 첫째로 꼽을 것은 하츠필드다. 들여온 지 제법 오래됐다. 1970년대 무교동 르네쌍스 음악감상실을 기억하는 분들이면 알 것이다. 바로 그곳에 있던 스피커가 하츠필드인데 어렵게 오리지널을 구했다. 그 옆에 알텍 A5 스피커가 놓여 있다.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 국제극장에서 이걸 썼다고 들었다. 그 유명한 1005 타르혼에, 288B 드라이버에, 515우퍼에, 오리지널 통에…. 또 옆에 시리얼 6000번대의 AR3가 있다. 시리얼 1만번대 이하면 웨스턴 콘덴서가 장착된 최상품이다.

각도를 달리해서 세로 벽에 던텍의 소버린 스피커가 서 있다. 작업실에서 유일한 현대 스피커인데 2m가 훌쩍 넘는 키에 앞뒤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처음 세팅한 그 위치에서 조금도 이동시킬 수가 없다. 던텍 사이에는 텔레풍켄 빨간 배꼽 스피커의 원조 격인 ELA-L6 필드 스피커도 한 조 있다. 정말 귀한 스피커인데 이베이를 헤매고 또 헤맨 끝에 간신히 찾아낸 물건이다. 그리고 또 하나 JBL의 에베레스트가 있건만 더 이상 놓을 자리가 없다. 덩치 큰 에베레스트는 아내가 사는 집 거실로 유배를 보내야 했다.

이 스피커들을 위해 네 대의 프리앰프, 여덟 조의 모노모노 파워앰프가 작동된다. 각기 두 개씩의 톤암을 장착한 세 대의 턴테이블이 가동 중이고 CD 돌리는 트랜스포트, D/A 컨버터, 승압 트랜스, 다양한 차폐 전원장치 따위들, 그리고 1913년산 빅트롤라 축음기까지.

가게다. 이 정도면 내가 생각해도 오디오 가게로 보인다. 가정음악이 불가능한 까닭이 이것이다. 자장면을 못 먹어본, 아니 오디오를 접하지 못한 분이라면 이들 명단 나열에 ‘자랑질이냐’고 아니꼬워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공들인 세월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돈 들고 어디 가서 덥석덥석 살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란 점을 말하고 싶었다.

소리의 히말라야

이 여섯 조의 스피커에 안주하기만 했어도 내 삶은 여섯 아내를 거느린 헨리 8세 못지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나는 과잉으로 치닫다가 꼭지가 돌아야만 멈춰지는 중생인 것을. 적정한 선을 벗어나는 데서 오는 고통이 생기를 주는 것은 아닐까. 줄라이홀 공사가 끝나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나는 또 한 번의 대형사고를 저질렀다. 헨리 8세도 못 누려본 일곱 번째 아내. 그게 기혼 여섯 아내를 합친 만큼의 대역사가 될 줄이야. 도이치 사운드 고군분투기, 그 기억을 떠올려본다.

고군분투기, 그 시작은 충동적으로 전남대 황 교수를 찾아간 일이다. 그이의 표정은 나른했다. 다 귀찮고 지겨워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혹시 도통이 가져다준 무념무상의 경지는 아닐까. 공대 교수라는데 곧 은퇴를 한다든가 이미 했다던가. 무작정 찾아간 내 앞에 사모님이 반듯하게 깎아놓은 사과가 놓였다. 이제 그와 나는 막 심리학의 전투를 시작할 참이다.

이 자리는 시인과 공학자의 대면이 아니다. 우리는 모종의 거래를 하려는 중이다. 한겨울, 30평대 아파트 거실의 공기가 좀 탁했다. 화장실 쪽 벽지가 군데군데 부르튼 게 눈에 들어왔다.

도이치 사운드, 아메리칸 사운드, 브리티시 사운드….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보셨는지. 들어봤다면 당신은 오디오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본다. 웨스턴 일렉트릭, 탄노이 오토그라프 블랙 또는 실버, 클랑필름 오이로다인, 자이스 이콘, 클라르톤…. 이 난삽한 외래어는 모두 1920~40년대 오디오 시스템, 그중에서도 주로 스피커의 이름들이다.

길을 가다가 산을 오르다가 아주 많이 가버리는 수가 있다. 그때 남이 못 본 것을 본다. ‘견자(見者)’가 되는 것이다. 견자 고상돈은 일찍이 히말라야에 뼈를 묻었고 허영호는 아직 살아 있다. 죄송한 말이지만, 히말라야를 찾는 한 산 자도 산 것이 아니다. 언제 크레바스를 향해 자일이 끊길지 모르니까. 하지만 죽은 것도 죽은 것이 아니지 않을까. 먼 길의 비경이 그를 영영 살아 있게 한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무산소 히말라야 등정기 몇 권을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리 탐구에도 견자의 도착지, 히말라야가 있다. 한평생 오디오를 하다 보면 뼈 대신 자기 소리를 묻을 최종 기착지를 찾게 된다. 연대기로는 1940년대 이전까지, 등정의 종착점은 앞서 언급한 스피커 같은 것들이다. 모두 심각한 상태의 고철덩어리들인데 한번 맛을 알면 1950년대 이후, 그러니까 오디오가 일반 가정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해 상업적 목적으로 생산된 ‘상품’쪽으로 건너오기 힘들게 된다.

웨스턴 사운드 찾기…젠장 아싸라비야!

JBL사의 하츠필드(좌) 알렉 사의 A5(우)

광주에 컨디션 최상급의 오이로다인 스피커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인터넷 사이트에서 알았다. 그것도 신비스러운 음향을 자아낸다는 필드형이다. 필드 타입이란, 지금처럼 자석의 원리로 소리를 만드는 방식이 개발되기 이전에 사용되던 좀 원시적인 방식의 스피커다. 천연자석 대신 코일을 감아 DC 전류를 유니트에 흘려준다. 나 자신 30년 가까운 오디오 구력의 종착역을 찾을 때가 됐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전화하고 바로 다음날 득달같이 먼 길을 달려 찾아간 곳이 바로 무념무상 할아버지 황 교수 댁이었다.

국내에서 흔히 유러딘이라고 부르는 오이로다인은 독일, 아니 한때는 유럽 전역에서 최고의 극장용 스피커로 각광 받았던 대형기다. 하지만 올망졸망 동양 2국, 한식과 일식의 소리사랑은 애달프다. 대개 그 같은 거함이 서너 평짜리 거실에 죄송하다는 듯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게 마련인 것. 그래도 30평형 아파트 거실은 좀 뜻밖이었다. 게다가 노공학자의 거실에는 억대를 호가하는 노이만 커팅머신까지 놓여 있었다. 커팅머신이 뭔고 하니, LP레코드를 찍어내기 위한 주형(속칭 ‘가다’)을 제작하는 공작기계로 매우 괴상하게 생겼다. 세상에는 그런 거창한 공장 장비를 LP 트는 턴테이블로 사용하는 인간들이 있다. 황 교수 역시 중병을 앓으며 살아왔다는 증거물이다.

꾼들이 만나면 통상 사운드에 대한 고담준론으로 운을 떼며 일합을 겨루게 마련. 그런데 초탈한 표정의 노교수는 일절 그런 말이 없다. 아하, 허무와 무상의 염이구나! 평생 걸려 장만한 시스템 대부분을 처분하려는 도인의 ‘할!’에 맞설 대응책으로 나는 철저한 구매자 처신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운드에 아메리칸이라는 접두사가 붙는다. 연상되는 것이 무얼까. 바로 넓은 땅덩이, 그러니까 넓은 땅덩이의 소리를 내는 게 아메리칸 사운드다. 거창하고 시원스럽게 소리의 폭포수가 쏟아지는 특성을 지칭한다. 보통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JBL이나 이전 알텍 스피커의 사운드를 말하는데, 선수들의 세계에 뛰어들면 그 원조 격인 웨스턴 일렉트릭 사의 제품이라야 진짜 아메리칸 사운드로 쳐준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라. 오디오 한다는 인구가 제법 되지만 소위 ‘웨스턴’ 구비하고 있다는 집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웨스턴 한다’ 하면 제대로 갖추는 데 꽤 여러 개의 ‘억’이 동원되는 탓이다. 아울러 그보다 훨씬 높은 단위의 ‘억’이 동원되는 넓은 공간도 필수다. 내가 전해 들은, 혹은 가볼 뻔한 정통 웨스턴 시스템 완성자가 셋인데 그중 하나는 ‘몽’자 돌림의 정씨였고 또 하나가 LG의 구씨네였다. 젠장, 아싸라비야다.

그래도 보통사람이 1만원이면 실컷 즐길 수 있는 웨스턴 일렉트릭이 하나 있기는 하다. 파주 헤이리에 둥지를 튼 방송인 황인용씨의 음악감상실 카메라타를 아시는지. 거기 정면에 매달린 거대한 달팽이 모양의 혼(나발)이 바로 17A라고 부르는 순정 웨스턴 물건이다. 혼에 소리를 보내주는 드라이버도 웨스턴 555A. 저음용 우퍼(형번 4181)에 고음용 트위터(형번 597A)까지 웨스턴이니 제대로 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의 입장료가 1만원에 불과한 것을 명심하라. 실상은 절반의 웨스턴인 것. 스피커는 ‘지대로’라지만 정작 소리를 만들어 보내주는 앰프류는 죄다 도이치 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혹시 카메라타에 몇 억 기부할 독지가는 없으신가?

탄노이의 브리티시 사운드

웨스턴 일렉트릭의 역사는 초기 오디오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69년 그레이 앤드 버튼이라는 이름의 전기제조 상점에서 출발했다는데 원래는 백열전구 따위를 만들던 회사였다. 이후 전화기 회사로 성장하고, 토키 영화용 증폭기 사업에 뛰어드는 과정에서 3극관 진공관을 개발하면서 오디오 쪽의 선구로 자리 잡는다. 꾼들이 목을 매는 앰프들은 대개 웨스턴 일렉트릭 사가 토키 영화산업에서 손을 떼며 본격 개발한 1935년 전후의 물건들이다.

그런데 왜 이런 선사시대 소리에 광분하는 족속들이 생겨나는 걸까. 생각보다 단순한 그 이유는 나중에 한꺼번에 묶어서 말하련다.

요즘 구미에서 로하스 족이 뜨고 있단다. 무심코 그 단어를 접했을 때 깜짝 놀랐다. 아니 오디오 하는 인구가 그렇게 많아? 알고 보니 그 로하스는 ‘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의 약자였다. 환경친화적으로 품위 있게 잘 먹고 잘 살자 쯤이 되는 신조어다. 하지만 오디오 쪽에서 훨씬 먼저 쓰던 다른 로하스가 있다. 영국 스피커의 3대 명문인 로저스, 하베스, 스펜더 세 회사 이름을 합성한 것. 오디오 로하스들도 소박을 미덕으로 여겼는지 거창하고 화려한 대형기를 만들지 않았다. 자금자금하게 크기도 작고 소리는 온화하고 왠지 모를 기품이 느껴진다. 1970년대 이래 클래식 음악 쪽 오디오 입문기로 꽤 많이 애호되어온 것이 로하스의 여러 모델이다.

아, 도이치 사운드

로하스가 정통 브리티시 사운드의 하나이긴 하지만 브리티시의 대마왕은 따로 있다. 초창기 탄노이 스피커가 그것. 1926년에 가이 파운틴이 설립한 이 회사는 의사당 같은 곳에 연설용 스피커(PA 시스템) 알맹이를 납품했다. 자석 캡의 색깔에 따라 최초의 유니트를 모니터 블랙이라고 부르고 이후 모니터 실버, 레드, 골드 등이 순차적으로 출시된다. 이 중 블랙이나 실버 등이 지존의 대우를 받는다.

탄노이가 자랑하는 불후의 명 인클로저(통)로 미로형 백로드 타입인 오토그라프가 있다. 물건 자체가 워낙 귀해서 국내에서는 장인 김박중씨가 도면대로 카피한 국산통을 대부분 사용한다. 이 오토그라프 통에 1950년대경까지 생산된 모니터 실버나 레드 스피커 유니트를 부착하면 브리티시 사운드의 지존이 된다. 블랙이 최상이라지만 거의 박물관 소장품 급으로 희귀하다.

음악감상용도 아니고 정치인들 연설할 때 확성기로나 쓰이던 스피커 알맹이가 지상 최고의 명기로 대접받고 있으니 괴이한 일 아닌가. 후대에 탄노이 사가 개발한 그 많은 모델은 왜 거들떠보지도 않고 환갑 진갑 다 지난 고물딱지에만 열광하는 걸까. 그 이유 역시 웨스턴 일렉트릭과 마찬가지 사정이니 묶어서 말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독일이 음향설비의 최선진국이었다. 국가정책으로 집중 육성했다고 한다. 그 시절 음향장비에 가정용은 없었으니 극장용이나 방송 스튜디오 장비를 뜻한다. 그러니까 도이치 사운드를 추구한다는 것은 가정에서 사용할 수 없는 전문장비를 편의대로 개조해서 쓰는 것을 말한다. 도이치 사운드를 말할 때 히틀러가 종종 등장한다. ‘이 자이스 이콘 말가죽 스피커는 히틀러가 특별히 애용하던 거야요’ 등등. 소리에는 파시즘 공포가 없는 모양이다.

아메리칸 사운드에서 웨스턴 일렉트릭을, 브리티시 사운드에서 탄노이 오토그라프를 떠올리듯이 도이치 쪽에서는 클랑필름이라는 회사가 지존 노릇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인수, 합병, 분할이 점철된 지멘스, 텔레풍켄 등과 함께 말해야 하지만 그건 너무 복잡하다. 주로 ‘클랑’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클랑필름을 정점으로 친다. 오이로다인도 물론 클랑필름 사가 만든 스피커의 대표 주자다.

아메리칸 사운드가 장쾌, 통쾌를 뜻하고 브리티시 사운드가 온화하고 풍요로운 귀족성을 뜻한다면 도이치 사운드는 뭘까. 한마디로 그것은 소름이 끼칠 듯한 명징함과 치밀함의 세계다. 표면의 막을 한 겹 벗겨낸 소리라고나 할까. 듣다 보면 그 예민함에 지쳐 나자빠진다는 게 도이치 사운드다. 도이치의 예민함이 사람 지치게 하는 면이 있다면 마찬가지 논법으로 다른 사운드를 흠 잡을 수 있다. 아메리칸 사운드의 장쾌함은 거친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고 브리티시 쪽의 온화는 좀 멍청하고 불투명한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정답이 없는 취향의 세계. 그래서 각자 기질대로 찾아가 자기 진영의 우월성을 외치며 다른 쪽 애호가들과 쌈박질을 하는 것이다.

허무한 결말과 허깨비의 삶

황 교수와 나, 거실에서의 묵묵부답이 제법 길었다. 무념무상으로 초탈한 도인 앞에서 금액의 잔머리 컴퓨터를 가동시키고 있다는 티를 낼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사실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본격 도이치 사운드에 뛰어들어야 하나 마나 하는 철학적 번민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오이로다인 정도를 구입하면 이 동네 표현으로 독일병정이 되는 것이다.

긴 침묵이 흐른 끝에 교수가 먼저 말했다. 내던지듯이 불쑥.

“원하는 금액을 말하슈.”

아무래도 분위기에 압도된 것 같다. 나는 애초 흥정의 출발점으로 생각했던 액수에서 몇백만원을 높여 부르고 말았다.

곧바로 답이 왔다.

“그렇게 하슈.”

아뿔싸, 거래 끝! 몇백이라도 낮춰 말할 걸, 하는 후회가 치민다면 나는 소인배다. 다 귀찮고 다 싫다는 도인의 표정 앞에서 쫀쫀해지지 않으려다가 제풀에 백기를 들어버린 것이다. 마음속으로 원통이 부글부글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남아 있는 접시의 사과 한쪽을 들어 우적우적 씹었다. 허망하게 거래는 끝나버렸고 황황히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은 허청허청했다. 상당 기간 알거지로 지내야 하는 일이야 내 오디오 역사에서 새로울 것도 없지만, 어떤 정점에 진입하는 일이 이토록 간단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건 오해였다. 아주 많이 오해였다. 독일병정 되는 일이 쉽지 않다는 말이야 수없이 들어봤지만 이 심란한 스피커에서 소리를 터뜨리는 일이 그토록 길고 어려운 과정을 요구할 줄은 정말 몰랐다. 황 교수의 거실은 그로부터 몇 년 동안 벌어진 고군분투 분골쇄신의 출발지였다. 정말로 아싸라비야!

이름들이 있다. 박명수, 임형빈, 이선규, 현창수, 김태현, 최경열…. 직접 만나볼 기회가 없었던 신 사장, 도 사장, 이희웅…. 엔지니어가 있고 판매상이 있고 애호가가 있다. 이들과 얽혀들어야 했다. 완전히 어리둥절해지는 미로이자 신세계였던 탓이다. 대망의 스피커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소리가 터져 나오려면 동시대에 개발된 독일계 프리앰프, 파워앰프, 필드 전원부, 매칭 트랜스, 슬라이닥스, 케이블, 진공관, 콘덴서 등등 도이치만의 전용장비가 몽땅 새로 필요했다. 그동안 기기깨나 만지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영 먹통이었다. 용어에서 연결 방법, 부품 조달까지 모든 것이 생소하고 희귀했다. 전문꾼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원래 효과음향 장비였던 마이학101을 프리앰프로 개조하기 위해 뻔질나게 춘천을 찾아다녀야 했고, 도이치 장비 견문과 수배를 위해 양평을 드나들어야 했으며 전주, 정읍, 천안, 단양에 물건을 확인하거나 입수하러 가야 했다.

문화평론가 김모도 제법 바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 가지를 해결하면 두세 가지 예상 못한 문제가 연쇄적으로 튀어나왔다. 전국일주가 끊임이 없었다. 동일한 시간 안에 존재가 둘로 분리되어 뛰어다녀야 했다. 분리된 한쪽은 허깨비가 분명한데, 도이치 사운드 만드는 동안 내가 했던 방송, 강연, 원고는 암만해도 허깨비의 일인 성싶다.

원본의 장엄, 아우라

어째서 오디오 생활의 정점에 이르면 음향기기의 기본관점이 만들어지던 70~80년 전 고물딱지에 열광하게 되는 걸까. 골동 취향일까. 그렇지 않다. 세상의 꾼들이 공통적으로 도달하는 결론인즉 소리가 탁월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명확하다. 코스트를 고려하지 않고 개발된 천재들의 작품이지, 상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인재가 몰려드는 요즘의 IT분야를 떠올리면 된다. 그 벨 에포크(Belle Epoque) 시절엔 음향기기가 최첨단 산업이었다. 당대의 천재급 엔지니어들이 뛰어들어 아낌없는 물량투자로 만들어낸 걸작들이 바로 고전명기, 빈티지 시스템인 것이다. ED, RE604, AD1 같은 삼극관의 별들은 그렇게 탄생했고 영원히 다시 만들 수 없다. 복제 불가능한 원본의 장엄, 아우라가 빛나는 것이다.

줄라이홀에는 수없는 땜질로 난도질 된 온갖 부품과 전선 따위가 굴러다닌다. 모두 태어난 지 일흔, 여든을 넘겼다. 듣자하니 칼의 노래를 부르는 남한산성께서는 스물여섯 살짜리와 룰루랄라 하는 내가 몹시 부럽다고 하더란다. 자, 한번 와서 보슈. 내가 어떤 나이와 놀고 있는지. 우후후후후.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62&aid=000000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