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남편

2007. 7. 19. 13:55PRESS

울산여성회 월간지에 기고한 글 

 


행복한 남편

 

 



나와 아내는 화요일마다 서로 다른 모임이 있다. 늦을 때는 밤11시 가까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일이다. 그 날도 여느 화요일처럼 늦은 시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아내가 모임에 나가 애들만 어지러운 방안을 뒹굴고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일까? 삐걱! 하며 열리는 문이 오늘따라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방으로 들어선 나는 "안녕히 다녀오셨어요?"하는 애들을 뒤로 한 채 벌컥 화부터 났다.

"아니,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회의가 안 끝났나, 정말 너무 하구만!"하며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아빠 마음을 눈치 챈 초등5년생 딸 지혜가 재빨리 말했다.

"아빠, 우리요~ 오늘 숙제 벌써 다 해놨고요, 엄마는 조금 있으면 온 댔어요."

"그래? 잘 했어, 그러면 너무 늦었으니까 빨리 치우고 잠잘 준비하자."

"예 알겠어요 아빠"

그제서야 화가 누그러진 나는 씻으려고 목욕탕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빨래더미에 나는 또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 말았다.

"아니, 이건 또 뭐야, 이 사람이 도대체 뭘 하는 여잔지 모르겠네, 옷을 자주 갈아입는 내 습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지난번에도 덜 마른 속옷을 입고 출근하게 만들더니 정말 너무하는구만!"하며 들고 있던 물바가지를 사정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러자 와장창! 소리와 함께 물바가지는 박살나고 말았고, 그 날로 우리 집에는 두 개였던 물바가지가 한 개만 남게 되었다.



나는 여자가 결혼을 하고 나면 아무런 의식 없이 가정생활에만 매달려 하루하루를 사는 이른바 ‘전업주부’를 너무나 싫어했다.

그러던 나에게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98년쯤이었던가.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처남이 아내에게 여성시민단체 모임에 한 번 가보라고 권했던 것이다.

선뜻 그 모임에 다녀온 아내가 말했다.

"여자들이 화장도 별로 하지 않고, 옷도 수수하게 입었고, 말도 너무 잘 하는 데다 사회를 보는 눈이 보통이 아닌 것 같더라."며 아주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 뒤론 마치 뭔가에 홀린 듯 그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했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어려운 집 아이들을 위한 방과후 교실을 직접 맡아 꾸리기까지에 이르렀다.



사실, 나는 아내가 조금은 게으르고 무신경한 면이 있다는 것을 결혼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살다보면 달라지겠거니 했다.

'우유를 받아먹는 사람 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말처럼 아내가 여성시민단체 일을 하면서부터 달라져 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애들을 위해 연극, 독서지도, 역사기행 따위, 수많은 일거리들을 아무런 불평 없이 하면서도 틈틈이 집안일을 챙기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예전과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지금보다 시간도 많고 그리 신경 쓸 일도 없었을 때보다 훨씬 부지런하고 활기차게 생활하는 모습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듯 열심히 활동하는 아내가 걱정 될 때도 있다.

여성시민단체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거의가 대학생 때부터 여성운동을 해 온 사람들이라 몸으로 부딪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잘 해 내겠지만 아내는 그렇지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떠한 대가도 없는 데다, 많은 노력 또한 필요한 일들을 묵묵히 해 내는 아내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집에만 들어가면 바가지를 박 박 긁어댄다는 동료들의 아내와 견주어 볼 때 내 아내는 나에게 바가지를 긁기는커녕 바가지를 박살내도 이 날 이 때까지 눈치 채지 못하고 잘 살고 있으니 이 어찌 행복하지 않은 남편이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