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9. 30. 07:48ㆍ책 & 영화
미라벨 정원의 도레미송
미라벨 정원이 이처럼 유명해진 데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영향이 크다. 영화에서 보면 폰 트랍가의 가정교사로 들어온 마리아가 일곱 명의 아이들과 함께 미라벨 정원에서 '도레미송'을 부른다. 그들의 율동과 노래는 미라벨 정원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그것은 동적인 율동과 노래가 정적인 미라벨 정원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폰 트랍은 슈나이더 부인을 만나기 위해 빈으로 한 달 동안 여행을 한다. 이때 일곱 자녀들의 교육을 맡게 된 마리아는 커튼으로 아이들의 놀이옷을 만들어 입히고 음악교육을 시작한다. 먼저 음악의 기본인 도레미파솔라시를 모티브로 한 노래 '도레미송'을 가르친다. 아이들은 새로운 선생과 새로운 음악 그리고 새로운 교육방식에 잘 적응하며 금방 훌륭한 음악 패밀리를 형성한다.
이들은 이제 즐거운 마음으로 잘츠부르크 주변 자연과 문화를 즐기며 노래공부를 한다. 산에서도, 호수에서도, 정원에서도, 수도원 앞에서도 노래는 항상 즐겁고 재미있다. 그들은 미라벨 정원을 찾아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분수에서 출발, 꽃밭 가득한 정원을 지나 미라벨 궁전 계단으로 올라가며 노래한다. <사운드 오브 뮤직> 다큐멘터리 자료를 보니 이곳에서의 촬영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감독인 로버트 와이즈가 큰 딸인 리즐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마리아와 리즐이 연기에 대해 대화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미라벨 정원에서 체험한 살아있는 음악과 춤
그런데 이 정원에서 우리도 살아있는 노래와 율동을 만나게 되었다. 홍콩의 소년소녀합창단이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들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이곳을 찾은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영어로 된 노래도 있고 독일어로 된 노래도 있다. 노래 제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비교적 낯익은 노래들이다. 어떤 노래는 목소리만으로 노래를 부르지만, 어떤 노래는 상당히 낯선 타악기를 이용하여 노래의 흥을 키운다.
그 노래를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브라보를 외친다. 그들은 관광객들의 호응에 답하기 위해 두어 곡을 더 부른다. 이번에는 율동도 가미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합창단원이 50명이나 되어 각자의 개성이나 능력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화음으로 보아 오랫동안 같이 연습한 한 학교 학생들인 것 같았다. 개성이 강한 트랍가 일곱 명 가족 합창단만큼 개성이 있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잠시 큰 즐거움을 주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처럼 화창한 날씨도 아니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보고 키 큰 나무들이 나란히 심어져 있는 가로수길 앞으로 가니, 결혼을 한 신랑과 신부가 야외촬영을 하고 있다. 부케를 들고 오스트리아 전통복장을 한 신부와 예복을 입은 신랑이 가로수길 가운데에서 앞으로 나오며 왈츠를 춘다. 음악은 없지만 아주 즐거운 표정이다. 친구가 앞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이 순간을 기록한다. 나도 그들의 사진을 찍는다. 이들 신랑 신부는 마지막에 손을 잡고 걸어 나오는데 아주 즐거운 표정이다.
영화 속의 폰 트랍가 사람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폰 트랍의 본명은 게오르크 루드비히 리터 폰 트랍(1880~1947)이다. 그는 귀족이었기 때문에 줄여서 트랍 남작이라 부른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해군 대령으로 제대했고, 전쟁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폰 트랍이 일곱 아이의 가정교사로 마리아를 맞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영화에서 폰 트랍은 우여곡절 끝에 가정교사인 마리아와 결혼한다.
그런데 이들 가정에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독일에 나치정권이 들어서고,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 폰 트랍은 독일 해군에 의해 징집된다.
그러나 나치정권을 싫어했고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흡수 통합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그는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노래경연대회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는 심사결과가 발표되는 틈을 타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폰 트랍 일가는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로 망명한다.
여기까지 얘기가 얼마나 사실일까? 상당 부분이 허구다. 폰 트랍은 188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땅이던 지금의 크로아티아 자라(Zara)에서 태어났다. 1894년 해군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 리이카에 있는 해군학교에 들어가 4년 후 졸업했다. 그리고 2년 과정의 항해실습을 마치고 1900년 마리아 테레지아 함대에 배속되었다. 1902년에는 장교시험에 합격했고, 잠수함에 매료되어 1908년 새로 만들어진 잠수함 전단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1915년 4월부터 U-5의 함장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전쟁에 지면서 모든 해안선을 잃게 되었고,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해군이 필요 없게 되었다. 폰 트랍은 1911년 리이카에서 어뢰회사를 운영하던 영국인 로버트 화이트헤드의 손녀인 애거시 화이드헤드와 결혼했다. 그들은 리이카에서 멀지 않은 폴라(Pola)에 살림을 차렸다. 그들은 1914년 잘츠부르크 근교의 첼 암 제(Zell am See)로 이사했으며, 모두 7명의 자식을 낳았다. 1918년 제대와 함께 폰 트랍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아내가 물려받은 재산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1922년 아내가 성홍열로 사망했고, 1924년 잘츠부르크 근교의 아이겐(Aigen)에 있는 빌라를 사서 이사했다. 1926년 폰 트랍은 가까운 곳에 있는 수녀원으로부터 마리아 아우구스타 쿠체라(1905-1987)를 가정교사로 고용하게 되었고, 이듬해 그들은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폰 트랍은 47세였고 마리아는 22세였다. 그들 사이에도 세 명의 자식이 태어났는데, 둘은 잘츠부르크에서 하나는 미국으로 이주한 후인 1939년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1935년 폰 트랍은 돈을 오스트리아 은행에 투자했다 큰 손실을 보아 사업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가족은 생계수단으로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1936년 소프라노 가수였던 로테 레만의 권유로 콘서트를 열게 되었다. 그들의 노래는 오스트리아 수상에게까지 알려져 빈에 초빙되기도 했다.
1936년 폰 트랍은 독일 해군의 고위직을 제안 받았으나, 나치와 히틀러를 싫어해 오스트리아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들은 이탈리아로 해서 미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났고, 1939년 이후 완전히 미국에 정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1939년 스칸디나비아로 여행하면서 몇 달 동안 잘츠부르크에 체류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그들은 펜실베이니아주의 메리온에서 살다가 1941년 버먼트주의 스토우에 정착했다. 1942년에는 2.7㎢의 땅을 사 오스트리아 스타일의 트랍가 여관을 만들어 생활했다. 1947년 1월 폰 트랍가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구원단체를 만들었고, 그 활동은 자식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폰 트랍은 1947년 5월 폐암으로 사망했다. 1949년에는 마리아 폰 트랍이 쓴 <트랍가 중창단 이야기>가 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이야기가 1956년 <트랍가>라는 영화로 만들어졌고, 1959년에는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1965년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영화를 통해 유명해진 노래가 '에델바이스', '도레미송', 타이틀곡인 '사운드 오브 뮤직'이다. 오스카 햄머슈타인이 가사를 쓰고 리차드 로저스가 곡을 붙인 '사운드 오브 뮤직'은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노래 백곡 중 상위권에 주로 머물러 있다.
정원과 궁전 한 바퀴 돌아보기
미라벨 궁전은 1721년부터 1727년까지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되었고, 1730년에는 프란츠 안톤 단라이터에 의해 정원도 완전히 리모델링되었다. 1714년부터 이미 노천극장이 있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난장이 정원도 생겨났다. 1854년 프란츠 요셉 황제 시절 미라벨 정원이 대중에게 개방되었고, 1913년 페가수스 분수가 생겨났다. 분수 주변에는 현재 네 그룹의 조각상이 있는데, 이것은 불·공기·땅·물을 상징한다고 한다.
미라벨 궁전에는 현재 잘츠부르크 시장의 집무실과 의회 사무실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또한 결혼식, 회의, 콘서트 등 여러가지 행사와 공연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 내부를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미라벨 정원을 한 바퀴 돌면서 잘 가꾸어진 정원과 주변의 조각품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신화상의 동물이나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분수의 날개 달린 말 페가수스도 그렇고, 여인을 납치하는 조각상도 그렇다.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의 음악을 생각하다.
정원을 보고 나서 우리는 미라벨 광장으로 나온다. 광장 한쪽에 있는 갤러리에서 독일 작가 안젤름 키퍼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우리와 함께 여행한 한 선생이 미라벨 정원을 보는 대신 바로크 박물관과 갤러리에 들렀다고 한다. 그런데 내용물은 빈약한 편이라고 말해 준다. 박물관 남쪽으로는 현대식 건물이 있다. 이것이 바로 모차르테움으로 불리는 음악대학이다. 잘츠부르크 출신의 최고 음악가 모차르트를 추모하기 위해 모차르테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출신으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모차르트 거리, 모차르트 학교, 모차르트 초콜릿, 모차르트 축제 등이 오스트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에 존재한다. 그만큼 모차르트는 세계적인 인물이다. 모차르트 음악은 또한 태교뿐 아니라, 지성과 감성을 키우는데 좋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듣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 때문에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에 잘츠부르크는 너무나 좁은 곳이었다. 더욱이 히로니무스 콜로레도 주교는 엄격하고 편협한 인물로 모차르트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결국 모차르트는 1781년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으로 갔고, 그곳 궁정에서 일자리를 찾으려 했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평생 프리랜서 음악가로 살았으며, 그 때문에 오히려 새롭고 진보적인 음악을 만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음악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가장 사랑받는 음악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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