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2. 22:12ㆍLP & CD
요한나 마르치,Johanna Martzy(1924-1979)
루마니아 태생의 헝가리 바이올리니스트.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한 기품을 지닌 정연하고 우아한 연주로 마니아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요한나 마르치(Johanna Martzy,1924-1979).
많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정열적이고 남성들보다 오히려 더 감성적인 연주로 유명하지만 마르치는 여성스럽고 기품있는 군계일학의 연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쥐어 짜내며 폭발시키는 긴장감과 웅대한 스케일 감,그리고 섬세함으로 극도의 긴장과 이완을 넘나들며 풀어나가는 연주는 과연 최고라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지네트 느뵈,이다 헨델 등과 함께 1950년을 전후해서 연주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세상에 참 수많은 음반들이 있지만,어떤 것들은 애호가들의 외면을 받아 여기저기 널려 있는가 하면 어떤 음반들은 수집가들이 필사적으로 찾아다니고,수입되는 즉시 동이 나는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아마 후자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우리는 요한나 마르치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요한나 마르치는 1924년 10월 26일에 테메스바(지금은 루마니아의 티미소아라)에서 태어났다.
6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고,1932년에는 예뇌 후바이(Jeno Hubay,1858-1937))가 원장으로 있던 프린츠 리스트 음악원에 입학하여 후바이가 사망한 1937년까지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후바이는 마르치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열 명의 바이올린 연주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는데,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13세에 공개 연주를 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대 성공을 거두었다.
리스트의 친구인 명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를 기념한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고,23세에는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상위 입상하였다.
이 무렵부터 유럽과 미국 공연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44년 3월에 독일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그녀와 남편 멜라 칠러리는 조국을 떠나 무국적 상태가 되어 티롤에 몸을 숨겼다.
오스트리아 인에게 발각되어 장시간 심문을 받던 그들은 마침 프랑스 군대의 진격으로 구출되었는데,마르치는 1946년까지 그 군대에 머무르며 연주를 했다.
1950년 그녀는 부유한 스위스의 출판업자인 다니엘 츄디(Daniel Tschudi)를 만났다.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악기 수집가이기도 한 츄디는 1945년에 카를 플레쉬의 미망인으로부터 만투아의 피터 과르네리가 만든 플레쉬의 바이올린을 사들였다.
츄디는 이 악기를 마르치에게 대여해 주었지만 그녀의 격렬한 연주법에는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1936년부터 그가 소장해오던 1733년산 카를로 베르곤찌(Carlo Bergonzi)로 교환해 주었다.
또 츄디는 마르치에게 온당한 방법으로 크라이슬러와 후베르만이 사용하던 1733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주었으나,마르치는 유독 베르곤찌를 선호했고 모든 녹음 작업에도 이 악기를 사용했다.
1964년에 존 프리차드(John Prichard)가 지휘하는 런던 필과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런던 연주회를 마쳤을 때 <타임즈>(The Times)는 그녀의 연주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마르치는 빼어난 주법을 구사하는 위대한 연주자다.
[출처]http://blog.naver.com/chaos719kr?Redirect=Log&logNo=60051579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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